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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실상(참모습)
 
 
1. 박정희는 히틀러를 추종했는가?
 
박정희의 정신적 스승은 히틀러임이 분명하다. 박정희(정권)가 히틀러의 모든 정책을 연구해서 배워서 모방한 것 같이 여러 면에서 유사한 점들이 너무나 많다. 히틀러를 모르고서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정책들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상관을 정면에 내세워 함께 나치당을 만들고는 경쟁자가 될까 바 두려워 상관(에른스트 룀)을 반역모의했다고 제거했다. 박정희도 상관을 정면에 내세워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경쟁자가 될까 바 두려워 상관(장도영참모총장}을 반역모의했다고 제거했다. 히는 국민투표를 통해 1인독재통치법을 만들어 총통이 되었는데, 박도 국민투표를 통해 1인독재통치법(유신헌법)을 만들어 총통처럼 되었다. 히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권력을 장악했는데, 박도 비상사태(계엄령)을 선포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히는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를 만들어 반대자를 탄압하고 정치공작금을 만들었는데, 박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그같이 했다. 히는 악독한 언론탄압과 언론검열로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막았는데, 박도 그랬다. 히는 흑색 기만 선전으로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르게 하고 공산주의자가 불을 질렀다고 기만하며 공산주의 정치가들과 반대 정치가들을 탄압하면서 불안 공포 긴장 정치를 조성하며 반대 세력을 제거했는데, 박도 흑색 기만 선전으로 중앙정보부가 수많은 간첩 사건을 조작발표하며 불안 공포 긴장 정치를 조성하면서 반정부 인사를 탄압했다. 히는 고속도로, 제철소, 공장 등을 건설하고 잠수함 비행기까지 만들어 근대화의 기틀을 이루어 놓았는데, 박은 히의 고속도로, 제철소, 공장 등을 직접 둘러보고 깊이 감명을 받아 이것들을 18년 장기간 동안에 모방 건설하여 근대화의 기틀을 이루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근대화의 기틀을 이루게 한 것은 미국의 힘이 컸다. 미국은 USAID(친미국가 개발처)의 주도하에 경제원조와 경제개발 정책에 도움을 주면서 경제부흥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다. 만일 미국이 앞장서서 도와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 때문에 미국의 도움을 먼저 받은 온대기후에 속한 친미 민주국가들은 거의 다 먼저 선진국이 되었다.
 
히는 싸움만 하는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보다 허약한 체제라고 생각했는데, 박도 그렇게 생각했다. 극소수 나치 당원을 제외한 대다수 독일 국민은 1인독재통치법을 만들고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히를 정신병자 독재자로 취급하는데, 1인독재통치법(유신헌법)을 만든 박을 한국 국민도 정신병자 독재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2. 과연 박정희가 근대화와 경제부흥을 이룩했는가?
 
박정희(정권)는 독일의 근대화와 경제부흥을 연구해서 독일을 모델로 하여 근대화와 경제부흥을 이룩했다. 일본도 문호개방을 하며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면서 특히 독일의 근대화를 모방하면서 근대화를 이룬 나라이다. 독일은 제2차 산업혁명의 발원지로 과학기술이 활발히 발달하여 중화학공업이 발달해 눈부신 근대화를 이룬 나라이다.
 
1964년 12월 8일 국빈방문초청으로 서독에 간 박정희는 서독수상 에르하르트를 만나 회담했다. 이 자리에서 박은 ``독일처럼 부강해지는 방법을 배우기위해 그리고 경제원조를 청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에르하르트(경제학교수 출신)는 분단국가의 뼈아픈 상처를 통감하기에 박에게 기꺼이 한국의 경제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독일의 경제부흥을 예를 들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면서 고속도로, 항만, 제철소 등 기간산업 건설에 적극 투자할 것을 권했다. ``우리 서독정부는 중화학공업 투자를 선행하면서 사회간접자본(기간산업)을 확충했습니다. 자유시장경제를 빨리 복구시키며, 중소기업 육성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분단국으로서 경제번영만이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까운 우방인 일본과도 손을 잡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다음날부터 박은 고속도로, 루르탄광회사, 공장 등을 둘러보았다. 지멘스사 소장은 박에게 철강이 없으면 근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박은 제철공장 건설을 서둘렀고, 울산종합제철소 건설계획에 독일 철강회사들이 참여했다.
 
서독정부는 이미 장면내각(군사쿠데타로 11개월 존속) 때 한국의 경제발전을 적극적으로 도울것을 약속했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경제원조와 기술원조를 하기 시작했다. 장면내각 때 서독이 한국광부를 고용한다는 각서를 양국회사(석탄공사와 지멘스사)가 체결했다. 1961년 1월에는 화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서독 지멘스사가 건설자금 차관 제의를 하고, 기술자를 보내기로 했다. 1963년부터 광부(약 8000명), 간호사(약 1만명)가 한국으로 부쳐오는 돈은 한때 GNP의 2%에 달해 경제개발을 하는데 주요한 자금으로 쓰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 친미국가들은 굶주림과 빈곤에 허덕였다. 공산주의 혁명은 가난한 나라에서 일어나 공산화되기 쉽다. 유럽의 공산화를 막고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경제 부흥을 미국이 주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럽을 부흥시켜 경제원조를 중단하고, 유럽을 미국의 큰 경제시장으로 만들어 미국상품을 대수출하여 국내의 경제침체도 벗어나 미국을 경제대국으로 키우려는 계획도 있었다. 그래서 추진한 경제개발정책이 마셜플랜(마셜계획, 유럽부흥계획)이었다.
 
마셜플랜을 받아 들인 유럽친미국가들은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아가며 미국의 경제개발정책에 따라야 했다. 그 때문에 미국이 유럽 친미국가들의 경제개발을 주도 지도한 것이며, 때로는 자문 충고 조언 역할도 했다. 마셜플랜 도움으로 전유럽친미국가들은 고도 경제성장을 했다. 독일의 경우 마셜플랜(1947년부터)에서 보낸 미국 경제전문가들과 독일경제전문가들이 호흡이 잘 맞았다. 이들의 협의 끝에 만들어진 수출 주도형 공업화정책을 독일정부가 추진해 정부의 부정 부패 척결, 교육 개혁(이공계 교육, 직업교육 강화), 세제 개혁, 환율 조정 등을 하며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며 기간산업에 적극 투자하면서, 동시에 기업의 신규 투자를 늘려 공장을 늘려 가자 경기가 활성화되면서 수출이 자연히 늘어나 수출 대국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독일은 중국 미국 다음으로 세계 3위의 수출대국이다. 독일이 경제대국으로 크게 된 데에는 물론 제2차산업혁명의 노하우의 힘도 컸다. 기간산업(기초산업)에는 전력, 석탄, 석유 등의 에너지산업과 철도,도로,항만,운하 등의 교통산업과 기계,조선,차량 등의 기계산업과 비료,소다 등의 화학공업 등이 있다. 기간산업은 일반 제조업의 기초가 되며 공업화의 촉매역할을 하기 때문에 경제부흥을 이루는데 대동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유럽이 근대화되고 경제가 부흥된 것은 미국의 마셜플랜, 근면한 국민의 노력, 정부의 적절한 경제정책 때문이었던 것이다. 누구 한 사람이 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단정지어 믿고 말하는 어리석은 유럽인은 한 사람도 없다.
 
 
북한은 소련의 경제원조를 받아가며 3년만에 전후 복구를 끝마쳐 그 당시 경제력이 세계 50위, 남한은 101위로 남한보다 경제력이 앞서가며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57~61년)을 추진 중에 있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1928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실시해 3차까지 눈부신 근대화와 경제부흥을 이룩했다. 북한에 뒤져 다급해진 장면 내각(60~61년)은 서둘러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했다. 6.25 전쟁이 끝나고 7년 후에 일어난 4.19 데모로 남한이 혼란에 빠지자 케네디 대통령 책상 위에는 `` 빈곤한 남한은 지금 반정부 데모가 격렬하게 일어나 반미 감정으로 번져 민족주의 감정을 상해 혁명이 일어나 공산화될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만일 남한이 공산화되면 미국의 태평양 방어라인이 뚫려 일본도 불안 해지므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해서도 미국이 적극적으로 한국의 경제부흥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공산주의 혁명은 가난한 나라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경제가 부흥되면 경제원조를 중단하고 미국의 좋은 경제시장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케네디 대통령은 즉시 한국의 경제개발과 근대화 추진계획서를 작성 보고토록 했다. 동시에 USAID(친미국가 개발처)를 만들어 가난한 친미국가들에게 경제원조를 해주며 경제전문가들을 보내 경제개발과 근대화 작업을 주도적 지도적으로 이끌게 하며 때로는 자문 비판 충고 조언 역할도 하게했다.
 
장면 내각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서를 넘겨받은 박정권은 수정 보완하여 추진하고 있었으나 미국 경제전문가들이 비현실성 부분이 많으니 다시 수정 보완하라고 하여 수정 보완하여 다시 추진하였다. 추진 중에도 미국 경제전문가들의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수정을 요구하고 이에 안 따르면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해 대부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만일 그 당시 미국이 경제원조를 중단하면 한국경제는 곧 붕괴될 상황이었다.
 
미국 경제전문가들은 한국도 독일의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정책을 권고하면서 정부의 부정 부패 척결, 교육 개혁(이공계, 직업교육 강화), 조세개혁, 환율 조정 등을 하라고 조언했다. 그 당시 박정희의 경제 과외교사가 조엘 번스타인 경제 전문가였다. 그 당시 환율이 1달러에 133원인데, 미국 경제전문가들은 1달러에 300원으로 하라고 했다. 공장에서 1달러짜리 상품을 만들면 환율이 오르면 기업 투자자들은 2배 이상의 이득을 보게 되므로 너나나나 투자에 매달리므로 공장도 늘어나 수출도 자연히 늘어나게 마련이다. 독일처럼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며 기간산업에 중점 투자하면서, 동시에 기업의 신규투자를 늘려 공장을 늘려가니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한국도 자연히 수출이 늘어났다.
 
케네디 대통령은 일본 이께다 수상에게 한국은 일본의 안보에도 직결되니 일본도 한국 경제개발에 동참하고 한일국교정상화도 조속히 추진하라고 강력하게 말하자 일본 수상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한국의 경제부흥의 원동력 중에 또 하나는 서방 세계의 장기저리차관이었다. 인플레가 심한 개발도상국들에게 장기저리차관은 10년 20년 후에는 거의 거저 주는 돈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환율 인상이 인플레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40여년 동안 한국의 환율은 겨우 4배 정도 인상되었으나 물가는 100배 이상 올랐기 때문이다.
 
일본이 36년간 한국을 착취해 간 보상으로 3억달러 무상원조, 2억달러 장기저리차관을 해주는 조건으로 한일기본조약이 1965년 6월 22일에 체결되었다. 1965년 우리나라 예산이 3.5달러 정도이다. 박정권은 일본원조와 서방세계원조로 고속도로건설, 포항제철소, 공장 등 근대화와 경제부흥을 추진하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서방선진국들이 어느정도 경제적으로 여력이 생겨서, 미국의 도움을 되갚기위해 미국의 힘을 덜어주기위해 서로 뒤진 우방국가들을 돕는 시대이다. 누가 정권을 잡던 미국의 압력에 의해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 질수 밖에 없었고, 베트남 파병(1964년부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두건도 경제개발을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 서방세계의 경제원조가 첨부되니 경제개발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게 된다. 군사쿠데타가 안일어났어도 어떤 민주정부라도 서방세계의 경제원조시대에 18년 동안 긴세월 동안 경제개발을 하면 군사독재정권보다 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 일본은 미국의 적극적인 경제원조로 15년 후에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했다. 소련은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1928년~)부터 15년 후인 1943까지 눈부신 경제부흥을 이룩했다.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부흥을 박정희 혼자서 이룩한 것이 아니라, 미국, 일본, 서독 등의 경제원조와 미국의 경제정책 도움과 근면한 한국민의 피나는 노력과 서방세계의 장기저리차관과 정부의 적절한 경제정책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권은 배은망덕하게 사대주의 사상 운운하면서 언론탄압을 하면서 기만선전으로 마치 박이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부흥을 이룩해놓은것 처럼 선동했다. 동시에 비밀조직인 재건동지회에서 세뇌당한 언론인과 대학교수와 그 제자교수들이 지금까지도 그렇게 선동하고 있다.
 
 
 
 
3. 박정희의 사상은 어떠한가?
 
박정희는 친형 박상희(남로당)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자 남로당(남조선로동당)에 가입했다. 형이 죽자 형의 친구인 이재복(남로당)이 형의 가족을 보살피면서 박정희에게 공산주의 장점을 말해 주면서 포섭하자 형의 복수도 할 겸 형의 가족의 신세도 갚을 겸 남로당에 가입했다. 조갑제(언론인)씨에 의하면 박의 청년 시절의 성격은 현실에 대한 불만, 기성 사회에 대한 반항, 외세에 대한 거부감, 사회에 대한 개혁 의지가 강했다고 하는데,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흔히 갖는 혁명사상인 것이다.
 
여수.순천 남로당 반란 사건에 연루된 박은 당시 육군본부 작전 정보국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비밀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박은 수사 받을 때 목숨이 위태로우니까 군부 내 남로당 동지들의 정보를 모두 폭로하고 혼자만 살아남았다. 수사 받을 때 박은 백선엽 육군정보국장(숙군 총책임자)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박의 만주군관학교 선배가 백선엽씨를 잘 아는데, 선배가 백선엽씨에게 박의 구명활동을 하라고 말한다. 백선엽씨는 과거 그에게 큰 신세를 졌기에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 준다. 그래서 백선엽씨는 박의 구명활 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미군의 석방 동의와 정부의 허가를 받아 내어, 박은 형집행정지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 났다. 지독한 기회주의자 이기주의자인 박은 6.25가 터지자 정보장교가 부족한 한국군에 복직을 청원하여 복직해서 백선엽장군과 장도영장군에게 잘 보여 소장까지 승진한다.
 
지금도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민주주의자인가 아니면 공산주의 자인가?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의 모든 행적을 살펴보는 것이 더 명확할 것이다. 박이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있으며 군내의 모든 남로당 동지 조직원(약 300명)의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많은 국군을 포섭하여 남로당원으로 만들었다. 이는 그가 얼마나 깊숙이 빨갱이 활동을 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공산주의 헌법은 1인독재통치법인데, 유신 헌법도 1인독재통치법이다. 민주주의 선거는 선의의 경쟁 선거를 원칙으로 하고 공산주의 선거는 이를 허용하지 않으므로 유신 선거는 공산주의 선거나 다름없다. 공산주의 자들은 흑색 기만 선전으로 선동해 죄를 뒤집어 씌어 무고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거나 참형시키는데, 박정희 독재정권도 이를 일삼았다. 공산주의 통치자는 영웅으로 군림하는데, 박도 영웅으로 남으려 했다. 등등 여러 행적들을 종합해 살펴보면 박정희는 민주주의 자가 아니라 오히려 공산주의 자에 가깝다.
 
히틀러나 박정희는 공산주의를 싫어했지만 통치방법은 공산주의 통치자들처럼 했다. 공산주의는 원래 군국주의(군이 국가를 다스림)를 기반으로 하므로 히틀러나 박정희는 군국주의 통치자로 공산주의 통치자처럼 행동했다.
 
 
 
 
4. 과연 박정희는 짐승만도 못한 자인가?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명확해 질것이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위해서 일본천황에게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이라고 맹세 혈서까지 쓰고 만주 광복군을 토벌해서 잔악 무도하게 학살했다. 그 당시 한국국민은 항일투쟁을 하며 광복운동을 하던 고난의 시대인데, 박은 공을 세워 혼자 잘되어 승진하려고 민족에게 총 뿌리를 들이대고 비참하게 학살한 민족 반역자였다. 이를 본 동료 일본군은 저희들끼리 박은 미친놈 정신병자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는 그가 얼마나 간교하고 지독한 이기주의자 기회주의자임을 증거한다.
 
더욱 웃기는 것은 박정희가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항복했지만 조선총독부는 1945년 9월 3일까지 계속 통치하다가 미군정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그러자 패망한 일본군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박도 만주에서 고향으로 가다가 후에 한국군에 들어가려고 군경력을 쌓기위해 만주광복군을 찾아가 있다가 1945년 9월 21일에 광복군에 가입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돌아간 그 당시에는 광복군 활동은 필요 없었고 얼마 가지 않아 광복군도 해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국방부와 박정희 추종자들의 저서에서는 박이 광복군 활동을 열열히 했다고 기만선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분노할 일인가?
 
여수.순천 반란 사건 시 박정희(남로당 군사총책)가 체포되어 수사 받을 때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안 박은 남로당 동지 모두를 배반하고 동지들의 목숨을 팔아 동지들의 모든 정보를 폭로해 남로당 전원이 사형되고 박 혼자만 살아남았다. 짐승 무리도 함께 싸우다 이기면 함께 살고, 지면 함께 죽는데, 박은 짐승만도 못한 더러운 배신자이다. 박한테는 군인 정신도 전혀 없는 것이다. 유혈 쿠데타, 간첩 조작 사건 등으로 억울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철면피한 살인자이다. 짐승도 같은 동족은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박은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3선 개헌을 하지 않겠다고,1인통치법을 만들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여러 번 철석 같이 공약했으나 실천하지 않았다. 이는 거짓을 일삼는 사기꾼으로서 지도자의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이다.
 
박정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정계 사람들에게 ``나는 명치 유신을 떠올리며 혁명을 일으켰읍니다. 나는 명치 유신의 지사들을 존경합니다.``라고 말해 일본정계 인사들을 놀라게 하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명치 유신의 지사들은 바로 조선침략의 선봉자인 사이고 나카모리. 이토 히로부미 등이다. 이 얼마나 간교하고 야비한 민족 반역자인가? 일본의 환심을 사 차관 몇 푼을 더 얻어내려고 한 더러운 비열한 행동이 아닌가? 일본은 친일파인 박정희에게 검은 돈(뇌물)을 주어 꾀여서 한국을 일본 경제식민지화하려고 의도했다. 일본이 1961~1965년까지 박정희의 공화당에 준 검은 돈은 6천 6백만 달러로 지금의 약 2조 1천억원에 해당된다. 경제식민지는 한국이 원자재와 부품을 일본에서 사서 상품을 만들어 팔아 번 돈으로 다시 원자재와 부품을 일본에서 계속해서 사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2015년까지 대일 무역 적자가 576조원으로 늘어났다.
 
 
 
 
5. 과연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잘살게 했는가?
 
새마을운동의 원조는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이다. 농촌진흥운동은 조선총독부가 주도하여 1932~1940년 사이에 황국신민화정책(우리 국민을 일본천황의 충실한 백성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목적으로 실시했던 관제농민운동이었다. 1929년 세계공황 여파로 농촌경제가 몰락되자 총독부는 농민들의 불평 불만을 없애고 농촌을 살리기 위한 농가갱생계획으로 전개했던 사회교화운동이었다. 농촌의 생활개선이나 농민의 정신계몽에 주력했으나, 농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만한 농업정책의 부재로 농촌경제에는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다.``고 농민들을 선전하고 세뇌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견제하면서 농민들의 불평 불만을 무마시키는데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
 
박정희는 농촌진흥운동의 인재육성을 위한 지정학교인 문경보통학교에 3년간 교사로 있으면서, 농촌진흥운동원을 육성하며 농장지도도 한 경험이 있다. 박정희가 대통령선거를 치르면서 도시지역에서는 열세이고 농촌지역에서는 우세하여 겨우 이기곤 했다. 선거에서 확실히 이겨 장기집권하려면 농촌표를 긁어모우는 수 밖에 없어, 생각해 낸 것이 새마을운동으로 관제운동화하여 농촌표를 공략하려했던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면사무소 주도 아래 이장 반장 새마을지도자 4H운동원이 주축이되어 운동을 벌였다. 선거 때면 면장회다 이장회다 동네회다 하며 자주 열려 반공교육과 정부찬양교육을 일삼았다. 즉 북한의 도발야욕을 막고 우리나라를 잘살게 하기 위해서는 현 박정권을 계속 지지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1973년 1월의 연두 기자회견에서 ``10월유신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새마을운동이고,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곧 10월유신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선전포스터는 ``새마을운동은 유신이념의 실천도장(1974 대통령 박정희)``이라고 쓰여 나붙었다. 이렇게 기만선전하며 농민들의 불평 불만을 잠재우면서 충실한 농민들로 만들려고 애썼다.
 
새마을운동으로는 마을도로 보수및 확장, 작은 교량 건설, 도로 주변 풀베기 등이었다. 작은 교량건설에는 정부가 남아도는 시멘트를 무상으로 주고, 농민이 무상으로 부역했다. 농지세를 받아가는 정부가 인건비를 주지 않고 가난한 농민을 오랫동안 부려먹는 것은 민주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파렴치한노동력 착취인 것이다. 새마을운동의 원래 취지는 농촌을 잘살게 함이었는데 실제로 새마을운동은 농촌경제 살리기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농가소득을 올리는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농촌에 가면 젊은이들은 거의 없고 노인들만 사는 동네로 변해 버렸다. 농촌이 못살게 되어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갔기 때문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늘 새마을운동에 나갔다. 안 나가면 면사무소에서 비료를 공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나갈 수가 없었다. 아침 저녁으로는 새마을 노래가 마이크로 시끄럽게 울려 퍼져 혼을 뺏어가 다른 생각은 못할 지경이었다. 선거가 끝나면 반장이 아버지한테 대통령이 내는 술(막걸리)이니 마시러 오라고 불렀다.
 
새마을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유럽 농촌마을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그 지역 특성에 맞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가꾸어 놓아 어느 마을에 가든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내가 고향마을에 갔을 때 내가 그렇게 힘들게 일했던 새마을운동사업은 하나도 볼수가 없어 오랫동안 헛수고만 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것은 현대 기계장비가 더 넓은 도로와 더 웅장한 교량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손으로(삽과괭이)만 한 새마을운동 사업을 현대 기계장비가 몇일만에 끝내버렸다. 새마을운동은 나를 매우 들들 볶았기에 내 평온함과 자유를 빼앗아가고, 내 노동력을 착취해 가고,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던 괴로운 운동이었다고 회고한다.
 
 
 
 
6. 자주국방은 독뿔장군식 미련한 국방정책이다.
 
세계에서 자주국방을 할 수 있는 나라는 대국인 미국,러시아,중국 밖에 없다. 유럽 민주 여러 나라들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창설한 이후 큰 국방비 부담없이 평화시대로 경제부흥을 일으켜 거의 모두 선진국이 일찍 되었다. 우리나라도 한.미.일을 주축으로 하여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새로운 태평양조약기구를 창설하여 전쟁발발시 연합군이 즉시 출전할 수 있는 그러한 연합국방정책이 필요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원국은 자연히 늘어날 것이다.
 
북한은 공산국가들의 전초부대로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남한은 민주국가들의 전초부대로 역시 완충지대 역할을 하므로 어느 쪽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전략지역이다. 그 때문에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필리핀 등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전쟁은 쉽사리 일어나기 어렵다.
 
남북통일은 동서독처럼 북한 국민의 붕기로 이루어져야 하나 지금 붕기가 일어나면 북한이 즉각 발포하므로 북한에서의 국민붕기는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김정은이가 ``너 죽고 나 죽자``식으로 핵개발을 하는 것은 남침을 하기위한 것보다는 북한 공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자국책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선의 방법은 서독이 동독에게 유화정책을 쓴거와 같이 남북대화를 하며 긴장완화 분위기를 조성하며 경제원조를 하며 경제사절단을 보내 북한경제를 어느 정도 부흥시켜서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켜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하여 불평 불만의 여론이 형성되게 하여 대국민 붕기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최선의 장기적인 국방정책인 것이다. 설사 민중붕기가 안일어나도 남북한이 적대시하며 긴장고조 속에서 불안하게 사는 것보다는 유화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은 한민족의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국방정책과 유화적 종북정치가 최선의 국방정책인 것이다. 박정희가 국가비밀정보를 모두 움켜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김일성에게 보내 남북대화를 한 것도 유화적인 종북정치중에 하나이다.
 
 
 
 
7. 박정희의 여인관계
 
박정희의 첫째 부인(딸 하나)은 비참하게 버림을 당해 절로 들어가고, 둘째 부인(동거녀)은 도망가고 셋째 부인은 육영수이다.
 
박정희는 육여사가 살아있을 때도 색마짓을 일삼았다. 그 당시에는 요정정치가 일본처럼 유행이었다. 정부인사, 재벌들이 요정에서 만나 정치일을 성사시키곤 했다. 한 예로 미모의 정인숙 요정여인은 무려 26명의 정계, 재계인물들과 정을 통했다. 그 녀가 한 아들을 출산했는데 그 아기를 두고 세간에서는 박정희의 아들인지 정일권국회의장의 아들인지를 두고 온통 나라안이 시끄러웠다. 그 때문에 육여사와 박 사이에도 육박전(가정불화)도 잦았으며, 육여사 얼굴에는 가끔 멍이 들었다. 정인숙이 피살된 후 그녀의 비밀수첩 속에는 그녀가 상대하던 사람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박정희나 차지철이 텔레비를 보다 마음에 드는 여배우가 있으면 차지철이 부하보고 중정의전과장에게 전화해 교섭하여 데려오게 한다. 돈은 달라는 데로 다 주어 매수하여 궁정동 안가로 데려와 비밀유지 각서를 쓰게하고 박에게 들여보낸다. 아가씨들은 모델, 가수, 배우, 여대생들이었다. 돈은 청화대에 늘 넘쳐나기 때문에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다 주었다. 박정희의 정치자금 입금창구로는 공화당, 중앙정보부장, 청화대 비서실장이며, 공화당에 입금된 정치자금은 일단 청화대 비서실장에게 넘겨졌고, 공화당이 정치자금이 필요하면 다시 청구하여 가져가게 했다. 아가씨를 교섭해서 데려오는 일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맡았다. 궁정동 안가에 2oo명 이상의 연예인들이 다녀갔다고 중정의전과장이 증언했다. 한 아가씨가 2~3번 다녀가기도 했다.
 
궁정동 안가는 박이 색마짓하는 장소이다. 박이 죽던 날 궁정동 안가 별관에도 모델(여대생), 가수 두명의 아가씨가 왔다. 술좌석에는 박정희, 차지철, 김재규, 비설실장, 두 명의 아가씨 6명이었다. 박이 두 명의 아가씨 사이에 앉았고, 맞은편에는 김재규,비서실장이 앉았고 테이블 사이에 차지철이 앉았다. 박이 모델 아가씨에게 묻기를 ``예쁘게 생겼는데 나이가 몇이냐``고 묻자 24살이라고 답한다. 박은 이어 한잔하지 하며 아가씨에게 술을 권하고 술을 마시면서 함께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등 여러 곡의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며 흥을 돋군다. 맞은편에서 차지철은 옆에 앉아있는 김재규에게 부마데모(부산시와 마산시 데모) 진압에 대해 또다시 연거푸 몰아세운다. 그러자 수년간 참고 참아온 김재규는 화가 폭발하면서 박과 차지철을 악질 독재자, 인간쓰레기로 여겨 국민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거사를 치룬다. 그러자 18년간 꽁꽁 얼어붙었던 얼음대지는 서서히 녹아가며 만물이 자유로이 솟아나는 따스한 봄을 맞게 된다.
 
궁정동 안가는 5채가 있어 중정요원 몇 사람만 박이 머무는 안가를 알고 다른 중정요원들은 안가 인근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전혀 모른다. 안가의 술파티는 대행사(박정희,차지철,중정부장,비서실장,아가씨들이 있음)와 소행사(박정희와 아가씨들만 있고 차지철은 밖에 다른 방에 있음)로 치러졌다. 술파티방 옆에는 화려한 침실과 화장실이 있다.
 
 
 
 
8. 악마의 소굴 중앙정보부
 
김종필은 군사쿠데타기획, 재건동지회조직(비밀조직), 국민교육 헌장, 혁명공약, 중앙정보부법, 정치활동정화법, 군정통치법, 군사혁명위원회, 국가재건최고회의, 국가재건비상조치법 등을 만든 장본인이다. 물론 이런 것들을 김종필이 지시하여 김종필팀과 함께 만들었다. 김종필과 박정희는 민주헌법과 민주주의를 송두리채 파괴한 유일한 법파괴자이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중앙정보부(중정)는 공안정치, 정치자금확보, 공작정치, 야당탄압, 음모정치를 주목적으로 하여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불법적으로 유지시킨 악마의 소굴이다. 청화대 경호실과 중앙정보부는 바로 박의 왼팔 오른팔이었다. 박정희와 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은 악마의 3축으로 이들 3인의 공모 하에 군사독재정권을 장기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별의별 음모를 다 꾸며 온갖 만행을 다 저질렀다. 이 때 부터 한국의 부정부패, 불의는 급속도로 커지면서 나라 곳곳에 거대한 악마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중앙정보부장은 정보수사에 관하여 타기관 소속직원을 지휘감독한다`(중앙정보부법 제4조 1항)
 
`정보부장,지부장,수사관은 범죄수사권을 갖고 수사에 있어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제6조 2항)
 
`정보부 직원은 그 업무 수행에 있어 전 국가기관으로부터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받을 수 있다`(제7조 1항)
 
이 때부터 입법, 사법, 정부가 제기능을 하지 못하므로 민주주의가 완전히 허물어진 것이다. 이는 중앙정보부가 입법, 사법, 정부 보다 위이고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누구든 수사를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권력이 대통령 다음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래서 군사독재 2인자인 김종필이도 중정의 감시와 가택수사를 받아야만 했다.
 
세간에는 중정은 남자를 여자로만 못 만들고 무엇이든지 다 만들수 있다라고 알려져 있다. 중정은 없는 죄도 억지로 만들기 때문에 중정 앞에는 죄없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무고한 사람들이 간첩으로 만들어져 죽거나 무기징역을 받았다. 중정에서 고문받다가 사람들이 죽어 사라지거나, 병신이 되어 나오기도 했다. 독재정권의 비위를 건드리면 야당국회의원도 영장없이 체포해가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를 일삼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공안사건을 터트리는가 하면, 정치위기시에는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터트려 민심과 여론을 돌려 놓곤 했다. 이러한 일은 민주국가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군사독재정권은 악마의 집단인 것이다.
 
중정의 음모정치로 김영삼씨가 초산테러를 당하거나, 김대중씨가 납치되거나 했다. 한밤중에 판사가 가택에서 협박을 받거나, 동아일보기자들이 끌려가 중정에서 맞거나 감금당했다. 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이 간첩으로 몰려 죽거나 무기징혁을 받았다(이들 중 대부분은 오늘날 무죄를 받았지만).
 
김종필중정부장은 주식조작사건으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 일부는 박정희에게 상납하고 일부는 야당분열 공작정치자금으로 썼다.
 
부마데모(부산시와 마산데모)시 김재규중정부장이 박에게 보고하기를 ``체제에 대한 저항과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민중붕기가 일어나 5대도시로 확산될 조짐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박은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어. 후에 나를 사형이야 시키겠나?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차지철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200만명 희생시키는 것 쯤 문제가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는 박정희와 차지철이 얼마나 악랄하고 잔인한 자들인지 짐작케 한다.
 
차지철과 김형욱중정부장은 야당인사들을 돈으로 매수해 야당활동을 제대로 못하게 하는가 하면 강패들을 야당전당대회에 보내 각목대회로 만들거나, 강패를 야당당사내로 투입해 기물을 부수고 야당의원들을 구타하게 했다.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은 야당인사들을 정치활동정화법으로 정치를 못하게 묶어놓고는 비밀리에 비밀조직인 재건동지회(공화당 사전조직)를 1962년 1월 4일에 만들었다. 포섭대상은 교수,교사, 언론계,실업계, 공무원 등이며 62년 말까지 사무국요원(비밀교육을 받은 자)이 1200명, 포섭당원이 15만명으로 늘어났다. 포섭당원은 나중에 민주공화당의 핵심당원으로 되었고, 1971년에는 당원수가 무려 135만명으로 늘어났다. 면사무소직원을 통하여 지방유지들을 포섭하고, 포섭된 당원들에는 다시 포섭활동자금이 건네져서 포섭활동이 계속되었다. 재건동지회에서 비밀리에 교육받은(강사는 교수들) 언론인과 교수들과 그 제자교수들이 오늘날까지 박정희 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김종필은 재건동지회와 정치자금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자 이를 충당하기위해서 증권조작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워커힐 사건, 빠징고 사건 등을 일으켜 막대한 자금을 긁어모아 국민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했다. 그런데 육군보통군법회의 증권조작 선고공판에서 관련자 6명을 모두 무죄선고했다. 법원도 제기능을 못하던 시대였다. 김종필은 중정부장에서 물러나 법의 심판없이 8개월동안 외유했다. 이런 것들은 군사독재정권이 얼마나 악렬한 무법정권임을 증거한다.
 
민주주의 파괴의 원흉 김종필은 자신의 죄를 뒤덮기위해 개발독재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간교하게 변명한다. 이는 빈곤을 피해 잘살기위해 살인강도질을 일삼았다는 변명이나 다름없다. 독일이나 일본이나 미국 등이 경제개발을 하기위해 이렇게 잔악무도하게 독재정치를 했는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신사적인 민주정치를 통하여 눈부신 경제개발을 하여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9. 박정희의 악랄한 부정선거
 
군인에게 2등은 죽음을 의미하므로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1등을 해야 승리를 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이 병적으로 뿌리밖혀있는 박정희는 공정한 선거(민주선거)를 치를 수 없었다.
 
박은 구 정치인(5.16 이전의 정치인)들은 정치를 못하게 만들어 출마도 못하게 하는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 4300여명의 정치인을 묶어두고 적격판정 심사를 받게했다. 후에는 1인독재통치법(유신헌법)을 만들어 혼자 출마해서 혼자 당선됐다. 정치활동정화법(정치금지법)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세력을 제거해서 참신한 정치도의를 확립하기위해서 만들었다고 기만선전했다. 달리기 경주에서 다른 선수들의 손발을 묶어놓고 혼자 달려서 혼자 이기는 형국으로 이는 민주국가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박은 대통령선거 전에 야당표를 흡수하려고 야당교란작전으로 범국민당(여당인사+야당인사)=준여당을 만들었다가 선거 전에 민주공화당에 귀속시켰다. 이 얼마나 간교하고 악랄한 술책인가?
 
선거 전에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영남지역에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라는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포스터가 곳곳에 나붙었고,전단지가 각 지역에 나돌았다.
 
박은 윤보선씨와의 대통령선거에서 위와 같은 부정선거를 하며 겨우 15만표차로 이겼다. 박은 선거 전에 일본에서 빚(12년 상환)으로 밀가루를 다량으로 들여와 선거 2달전 가난한 농민들에게 재해구호활동 미명아래 무상으로 풀어대어 가난한 농민들의 구세주가 되었다. 공화당의 선거전략비법과 음모는 중정부장이 세웠고, 중정부장은 정부기관,지방의 관공소 등 모든 곳을 지도 통솔했다. 개표결과 도시에서는 윤보선씨가 앞서가다가 농촌지역과 특히 호남지역(밀가루를 많이 풀었음)에서 박의 몰표가 쏟아지면서 역전되어 박이 겨우 이겼다. 개표과정 중계에서 윤이 계속해서 앞서가자, 만일 선거에서 군사정권이 지면 신분보장이 안되 목숨이 위험하게 되니 김형욱중정부장과 군정들이 중정부장실에 모여 이미 중정에서 꾸며놓은 음모작전을 시행하려했었다. 선거가 진것므로 윤곽이 어느정도 들어나면, 중정부장은 즉시 명령을 내려, 각 개표소에 이미 파견한 중정요원들을 시켜 정전을 하여 개표원을 퇴출시키고 개표소를 잠그고 표차의 크기에 따라 비상사태를 선포해서 선거를 무효화시키던가 투표함을 갈아치우던가 하려고 획책했다.
 
박은 1971년 김대중씨와 선거에 이기고 나서, ``우리가 이번 선거에 700억원, 예산의 15%를 썼지만 시장에서 노점상인들의 돈을 빌려서 선거를 치룬 김대중이를 겨우 95만표 밖에 이기지 못했는가? 하마터면 총구를 뺄길뻔 했어. 이대로는 안되 선거제도를 고쳐야 되.``라고 말했다. 박은 선거 전일까지 유세마다 이번 선거가 자기에게는 마지막 선거라고 수십차례 국민에게 철석같이 맹세해놓고는 몇일도 안되어 딴 시꺼먼 음모를 계획한 그러한 비굴한 자다. 그리고나서 불과 1년 8개월도 안되어 돈 안들고 쉽게 이기는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박이 71년 선거에 쓴돈은 인플레를 감안하면 지금에 약 10조원이 넘는 거액이다. 이는 자유당 부정선거보다 몇 천배 몇 만배 더 큰 부정선거를 한 것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날로 거세지자 박은 정국의 혼란을 막고 유신헌법과 유신체제 유지 여부를 묻는 유신헌법 찬반국민투표를 1975년 2월 12일에 실시했다. 전세계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는 거의 대부분 정부의 여론몰이로 가결되었으므로, 이번 투표도 가결되었다. 그러나 순수한 투표가 아니고 엄청난 부정투표였다. 찬성투표운동을 하기 위해 돈봉투, 향응, 술과 음식이 오가는 금권투표가 만연했다. 정부기관이 개입한 대리투표, 관권투표도 만연했다.
 
여주군 한 국민학교에서는 부면장이 학교에 와서 상부의 지시라면서 선생님들에게 가가호호 다니면서 찬성투표운동을 하라고 말했다. 투표 몇 일 전에는 학교에서 찬성투표 홍보영화를 주민들에게 상연했다. 투표 당일 오후에는 면직원이 투표하지않은 투표지를 선생님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대리투표하라고 했다. 이러한 온갖 부정행위를 직접 접한 젊은 한 교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다음날 신민당사(야당당사)에서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부정투표에 대한 기자회견을 함으로서 독재정권의 만행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10. 박정희의 부정축재
 
박정희는 기업인들을 부정축제자로 몰아 감방에 넣고, 일본에 있는 이병철씨를 데려왔다. 박은 이병철씨에게 ``혁명정부에 협조하시오. 부정축재한 만큼 벌과금을 부과하려 합니다.``라고 협박한다. 이병철씨는 ``국민들 보기에도 안좋으니 벌과금 대신 공장을 지어 국가에 헌납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혁명정부를 적극 돕겠습니다. 구속된 기업인들도 혁명정부를 도울수 있도록 석방하십시오 ``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그들은 곧 석방되어 한국경제인연합회를 창설해서 한덩어리가 되어 혁명정부를 도왔다. 기업들이 차관을 하거나 수출입하거나 하면 금액에 따라 일정비율로 정부에 불법적으로 검은돈(뇌물, 정치자금)을 바치는 것이다. 정부발주공사를 맡은 기업도 일정비율로 정치자금을 바쳤다. 이때부터 정경유착의 부정부패 불의가 뿌리를 내리면서 후손들은 군사독재정권의 고질병인 정경유착, 부정부패, 불의를 넘겨 받아 국민들은 분노에 찬 신음을 하게 되었다. 박근혜도 아버지처럼 정경유착을 하다가 꼬리가 잡힌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기업이 번 돈은 마땅히 기업운영과 노동자와 국민(기업세금)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박은 이 돈을 가로챘으니 날강도인 것이다. 국민이 노동자를 보내고, 기업상품을 사주고, 국민이 예금한 돈을 싸게 융자해주어서 기업을 살렸기에 기업은 번돈의 일정부분을 마땅히 국민에게 세금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63년 9월말 대선 기간중 김형욱중정부장은 이병철 등 삼분에 관계된 기업인들을 반도호텔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지금 대선자금이 부족하여 매우 어려우니 대선자금을 모금해 달라고 했다. 기업인들은 그렇게 많은 돈은 지금 어렵다고 하자 김형욱은 정부가 고시가격으로 묶어놓았던 삼분(밀가루,설탕,시멘트)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기업들은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미국의 원조달러로 삼분을 수입해 창고에 넣어두고 소비시장을 장악해 가격을 폭등시켜 폭리를 취하고 설탕은 역수출하여 이중으로 폭리를 취했다. 게다가 수출보상금까지 받았다. 정부는 기업들의 횡포를 묵인하는 대가로 폭리한 상당부분을 정치자금으로 받았다. 삼분값이 몇배로 오르면서 부르는 것이 값이되어버리자 죽어나는 것은 국민들이었다. 결국 박정희 대선자금을 국민이 지불한 것이다.
 
군정 때에는 군정이 공원, 능(구황실재산), 강변, 하천, 산 등 국유지를 군정 친인척들과 공모하여 시세의 백분지 일도 안되게 헐값으로 불하해서 짜고 사고팔아 폭리를 취했다. 즉 나라땅을 군정놈들이 팔아먹어 부정축재하여 떼부자들이 되었다. 심지어는 육영수 오빠도 여기에 끼었다. 여론에서 들고일어나자 수사는 늘 그랬듯이 용두사미처럼 흐지부지되었다.
 
1966년 삼성은 한국비료공장(세계최대)을 건설하면서(약 2800만 달러) 막대한 정치자금(약 1000만 달러)을 제공하고, 이를 만회하기위해서 사카린을 밀수해서 시중에 풀어 여론이 악화되자 이를 무마하기위해 이병철은 한국비료공장과 대구대(후에 영남대)를 국가에 헌납했다. 1994년 공기업 민영화 정책에 따라 이병철은 국가에 돈을 주고 비료공장을 다시 사들였다. 기업들이 상업차관을 하면 상당부분을 정치자금으로 내놓는다. 기업은 이를 만회하기위해서 나머지 대부분을 부동산에 투입해 땅장사를 하여 손실을 만회하기도 했다.
 
소문에 의해 부정축재자인 김대중씨의 재산은 유족이 세무소에 신고한 상속세신고서에 전 재산이 12여억 원이었다. 이중에 대부분은 노벨상 상금이 포함되어있다. 김영삼씨는 자기가 가지고있던 집이 전재산이다. 이 얼마나 청렴결백한 정치인들인가
 
소문에 의해 청렴결백한 박정희가 서거 당시 남긴 재산은 MBC(문화방송) 주식과 부산일보를 소유한 정수장학회(5조원 이상), 영남대학교(교주 박정희), 육영재단,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부지, 6억원의 현금이었다. 모두 합치면 전문가에 의하면 10조원에 가깝다고 한다. 박정희의 유산은 박정권이 부정축재 척결의 명분으로 강압적으로 야비하게 헌납받은 재산이다. 정수장학회 재산은 박정희의 지시로 중정부장이 김지태에게 부정축재 등 9개 죄명을 씌워, 김지태가 구속된 상태에서 협박에 못이겨 어쩔수 없이 헌납한 재산이다. 김지태는 7년 구형을 받고 헌납했는데, 헌납하자마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지시로 공소취하로 풀려났다. 박정희가 행한 행동은 강도보다도 더 비열하고 악랄한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종필, 이후락, 군정때 국유지를 짜고 사고 판자 등 수없이 많은 군정놈들이 부정축재한 돈은 천문학적이다. 군정놈들은 부정부패를 일소하기위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고 기만하나 이들은 한결같이 돈을 강탈하여 어마어마한 재산을 만들었다. 결국 이들 모두는 부정,부패, 불의의 원흉이다. 이들이 부정축재한 재산은 국민의 피와 땀이 들어간 재산으로 법치주의와 정의주의를 지키고 부정부패와 불의를 추방하고 국민화합을 이끌기 위해서라도 법을 고쳐 5.16 이후의 군정의 불법재산을 모두 추적해 환수해야만 한다.
 
 
독일의 경우, 독일 대통령 불프는 과거 주지사로 있을 때 주택구입시 은행대출을 일반인보다 싸게 대출받았고, 친한 기업가들로부터 공짜휴가(3~4일 간) 여행을 몇 번 받은 것이 언론에 의해 탄로나 빗발치는 여론에 못이겨 2012년에 결국 물러났다. 이는 독일이 얼마나 부정부패, 불의가 없고 정의로운 나라임을 증거한다.
 
 
 
 
11. 독재자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판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독재자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파서, 피살, 자살, 망명, 감옥, 유배 등의 비참한 말로에 다다르게 된다. 독재자의 공통점은 초조하고 불안하고 성급하고, 독단적이고, 외골수적이고, 영웅주의적이고 이기적이므로 국민과 이웃나라를 생각하고, 먼 앞을 내다보고 뒤와 옆을 살펴보는 여유와 통찰력이 부족하다.
 
1929년 세계경제공황의 여파로 독일에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자 많은 실업자가 생겨나 국민들의 불평불만은 극에 달했고, 국민경제는 바닥 이어서 국민들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이틈을 타 히틀러는 나치당을 만들고 이어서 총통까지 된다.
 
히가 군수공장들을 많이 지어 실업자들을 군수공장에 투입하니 실업자는 거의 없어졌다. 그러자 국민들은 히틀러를 구세주처럼 추앙했다. 생산된 군수품을 소비해야 군수공장들이 계속 가동될 수 있다. 군수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군수공장들은 가동이 중단되고 이어서 실업자가 쏟아져나오면 히틀러는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된다. 군수품을 소비하기 위해서 히틀러는 전쟁을 하기 시작했고, 여러 나라와 전쟁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군수품이 필요하므로 더 많은 공장을 짓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만 점령하고 전쟁을 안했으면 되나 전쟁을 안하면 다시 실업자가 나오므로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전쟁을 하게 되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세계대전으로 확산되었다. 폴란드를 침공하지 말라는 연합국들의 마지막 경고를 무시하고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히틀러는 이미 스스로 깊은 무덤을 파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연합국이 해상에서 독일봉쇄령을 내리자 독일은 자유로이 무역이 안되어 자원이 부족해졌다. 그러자 히틀러는 지하자원이 풍부한 소련을 속전속결로 해치우려고 초여름에 침공했으나 빨리 찾아오는 소련의 겨울로 혹한 추위와 질퍽한 토질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
 
만일 히틀러가 처음에 군수공장대신 다른 공장들을 짓고 무역에 힘썼더라면, 독일과 세계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두번째 기회는 연합국도 독일이 독일의 옛영토인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는 것을 용인했으므로 오스트리아만 점령하고, 이웃국가들과 우대를 유지해나가면서 실업자가 나오더라도 군수공장을 다른 공장으로 군인들은 산업전사로 바꿔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이길은 독재자 히가 갈수있는길이 아니며, 오직 현명하고 통찰력 있고 외교를 잘하고 국민을 생각하는 지도자라야만 갈 수 있는 길이다.
 
 
박정희는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3선개헌을 하지않겠다고, 유신헌법(1인독재통치법)을 만들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여러 번 공약했으나 실천하지 않았다. 이는 무력 앞에는 국민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거짓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우선주의자로 정치지도자로서는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이다. 박은 1972년 10월 17일 불법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헌법을 중지시키고 국회를 해산시켜 국민의 자유와 주권을 탈취해갔다. 제2차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공포분위기를 극대화시키면서 언론과 여론을 침묵시키면서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막어놓고 정부만의 여론몰이로 12월 27일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 계엄령은 전시, 사변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하에서만 선포할 수 있다. 박은 쿠데타(61년), 한일회담 반대시위(64년), 유신헌법(72년) 통과 때문에 3번의 계엄령을 불법으로 내렸으므로 이미 3번의 사형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다. 이미 스스로 죽을 무덤을 너무 깊게 파들어가 이제는 밖으로 도저히 나갈수도 없게 되었다.
 
박은 사형선고가 두려워 민정이양을 못하고, 3선개헌을 하고, 유신헌법을 만들어 종신대통령으로 죽으려했던 것이다. 박이 후계자로 김종필에게 물려주면 김종필은 대통령되기도 힘들고(김종필은 직선제를 원했음), 설사되어도 언젠가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므로 박은 독재자, 살인자, 내란음모자, 부정축재자, 강탈자, 헌법파괴자 등 수많은 죄명에 걸려 법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점점 더 깊은 무덤을 파들어가게 된것이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득표율이 여당을 앞질렀다. 이는 장기 독재정권의 만행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이며, 정권교체를 하라는 신호탄이었다. 장기집권의 꿈이 좌절되자 박정희와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은 더욱 간교하고 악랄한 야당정치공작에 들어간다. 79년 5월 신민당전당대회에서 이철승씨를 총재가 되도록 음모를 꾸민다. 그래서 차지철과 김재규중정부장은 수시로 이철승과 이철승계 의원들을 만나 정치공작을 편다. 박은 ``김영삼이는 내눈에 가시야``하면서 이철승을 밀라고 한다. 신민당전당대회날 차지철이 김태촌 조직폭력배를 이철승에게 보내 각목 난동사건을 일으켜 전당대회가 유혈이 낭자한 각목대회로 되어 야당은 국민들로부터 무서운 지탄을 받았다. 이어서 깡패들이 신민당사까지 침입해서 기물을 부수고 야당의원들을 구타했다. 김영삼씨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씨가 총재로 선출되자, 박은 이를 갈며 김영삼을 제명하고 구속시키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김영삼씨가 국민들의 대대적인 호흥을 업고 반유신운동을 더 강력하게 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민당총재 김영삼의원을 제명했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국내외적으로 신임이 떨어지면서 인간이하의 비난을 받으면서 비참한 말로에 다다르게 된다. 한국의 인권탄압을 오랫동안 참아오던 미국카터정부는 마침내 박정희 제거방법에 몰두하게 된다. 박정희 유고시 미국이 대처할 방안까지 구상한다. 미 정보통은 박이 임기를 채우기 힘들다는 예측까지 하고 있었다. 야당총재가 제명까지 당하자 미국신문은 매일 대서특필하고 언론은 들끓었다. 인권주의자 카터미대통령은 ``박정권은 제거되어야 할 악마의 정권이다.``라고 저주했다.
 
국내 각처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그 중에서도 부마(부산시와 마산시) 항쟁이 매우 격렬했다. 78년 2차 석유파동으로 물가가 급속히 올라 민생고에 시달리던 시민들이 합세하여 격렬한 대규모 민중붕기로 되었다. 그러자 박은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차지철은 공수부대를 투입시켜 데모를 잔악하게 진압했다. 이때부터 박은 차지철을 더 신임하고 김재규를 더 질책하기 시작했다.
 
중정부장경질설이 나돌고, 미국의 신임을 얻었다고 생각한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악질 독재자, 인간쓰레기로 생각하고 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거사를 치룬다. 김재규는 수시로 미CIA, FBI, 미대사 등과 접촉하고 있었다. 사건 몇 일 전에도 김재규는 미CIA 서울지부장을 만나 미국은 지금 한국을 어떻게 보냐고 물었다. 지부장은 ``미국은 민주주의를 외면하는 지도자를 외면한다. 나는 김부장이야말로 민주주의와 한국민을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김수환추기경과 박정희 면담을 주선하면서, 김추기경에게 국내외 사정으로 보아 각하께 유신헌법을 제3의 안(민주헌법)으로 바꾸게 건의 좀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각하가 전방을 연말에 군단까지 늘 순시하는데, 3군단에 오시면 각하를 연금해 놓고 각하 옆에 녹음테이프를 갖다놓고 각하에게 하야 권고를 드리려 했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김재규는 야당인사들 사이에도 온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보면 10.26사건은 김재규가 우국충정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위해 행한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당시 권력서열이 박정희, 차지철, 김재규.......이었다. 차지철은 김재규나 여당의원들이 마음에 안들면 자주 권총을 들이대는 안하무인격 기고만장한 자였다. 차지철은 박정희 앞에서도 군대 대선배인 김재규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옆에 있던 박은 모른체했다. 경호실장이면 경호일에만 전념해야 하는데 그는 월권해서 정치, 안보 등 모든 일에 마치 대통령권한대행처럼 행동했고, 박은 이를 묵인했다.
 
 
 
 
12. 박정희의 인감됨됨이
 
박의 잔악한 언행들을 살펴보면 박의 인간됨됨이를 알 수 있다.
 
부마항쟁시 온건파 김재규중정부장이 ``체제에 대한 저항과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났습니다. 5대 도시로 확산될 조짐이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박정희는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겠어, 만약에 서울에서 부산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면 내가 즉시 발포명령을 내릴거야``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차지철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100만~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별 문제겠습니까?``라고 답한다.
 
공수부대가 동아일보를 침입해서 쑥밭을 만들고 기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라는 보고를 받고, 박은 ``동아일보놈들이 가슴이 오싹하고 혼쭐이 났겠지.``라고 말했다.
 
대규모 학생데모 때문에 박은 문교부장관에게 ``서울대학교를 폐쇄토록 해``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문교장관은 서울대학교는 유구한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 최고의 학문의 전당이므로 폐쇄시키면 사회적으로 너무나 큰 물의를 빚어 어렵다고 답하자, 박은 문교장관을 즉시 해임시키고 문교차관을 문교장관으로 임명했다.
 
김종필 생일날 김종필 집으로 초대된 박은 여러 사람들과 술좌석에서 얼칸히 술에 취해 말다툼을 하다가 ``내 검 가져와 저놈의 목을 베어 버리겠어`라고 여러 번 고함치고, 끌려서 청화대에 돌아와서는 ``내 권총 가져와 총을 가져오란 말이야``라고 고함쳐댔다.
 
박은 김종필에게 3선개헌만 해서 한번만 더 대통령을 할 거라고 맹세해놓고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안가에서 비밀리에 유신헌법을 만들게하고, 보안사령관에게 김종필을 철저히 감시하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보안사령관이 그는 국무총리이고 각하의 조카사위인데 어떻게 감시하느냐고 하자 박은 ``권력을 놓고는 부자간이나 형제간에도 피를 흘린 사실이 허다하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말이야.``라고 말했다.
 
박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인본정계인사들에게 ``나는 명치유신을 떠올리면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명칭유신의 지사들을 존경합니다.``라고 말했다. 명치 유신의 지사들은 바로 조선침략의 선봉자인 사이고 나카모리, 이토 히로부미 등이다. 박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려고 천황에게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이라고 맹세혈서까지 썼다
 
1965년 한일수교협상 당시 박은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에게 ``한일문제 해결을 위해 독도섬을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박이 김형욱중정부장에게 ``이봐, 형욱이 나 정권 못 내놔, 보복한다는데 정권을 내놔.``라고 말했다.
 
1971년 대선후보로 김영삼씨가 1969년 11월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도전하자 야당에서는 김영삼(42세), 김대중(45세), 이철승(47세), 유진산(65세)이가 도전하여 4파전이 되었다. 박은 김계원중정부장을 불러 ``나는 애송이와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싶지 않으니 유진산이가 후보가 되게끔 야당공작정치를 펼쳐.``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유진산씨가 대통령후보로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박은 중정부장을 불러 ``진산이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니 그게 말이나되는 소리야. 그동안 중정은 무얼하고 있었어. 일년 동안 야당공작을 한 결과가 고작 이꼴이야.``라고 몹시 질책했다.
 
대선 중에 김대중씨는 박이 이번 선거에서 이기면 곧 총통제를 만들기 때문에 이번 선거가 마지막 대통령선거가 될거라고 유세하자, 박은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김대중을 잡아넣어.``라고 말하자 참모들은 지금 선거초반인데 입건하면 더 역효과가 된다고 만류했다. 박은 이세상에서 자기만 제일인것 처럼 매사가 안하무인격이다
 
1979년 5월 김영삼씨가 신민당총재로 선출되자, 박은 이를 갈며 ``김영삼이를 제명하고 구속시켜버려.``라고 김재규중정부장에게 명령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이 죽던 날 저녁 궁정동 안가에서 박은 중정부장에게 ``신민당 공작은 어떻게 되었어, 김영삼이를 제명시켰으니, 이제는 구속시켜야지.``라고 말하자 김재규는 이미 제명된 김영삼이를 구속시키는 것은 그를 두 번 죽이는 셈입니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지요라고 진언한다. 그러자 화가 난 박은 ``정보부가 무서워야지, 야당놈들 비리만 쥐고 있으면 되, 잡아 들일놈들은 빨리 잡아들여야지.``라고 김재규를 몹시 질책한다. 옆에 있던 차지철은 정보부가 얼마나 약하면 학생이나 야당놈들이 정면으로 달려들겠어, 까불면 학생이고 야당놈들이고 탱크로 몽땅 깔아 뭉개야 해. 도대체 중정이 부마사태 처리도 그렇고 뭐 하는게 있어라고 김재규를 몰아세운다. koohun@hotmail.de 허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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