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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8일 (토) 00:50 기준 최신판

三, 分布와俗習

첫재, 北朝鮮에 잇어서의 그들의分布狀況을보건대 前者에 잇어서도 屢說한바와같이 그들은咸鏡道奧地一帶에서 集團生活을 營爲하고잇으며 그들은 大槪 深山幽谷에 그住家를가지는 關係上, 그들의 人口乃至戶數에對한 正確한調査의 至難함은 勿論이다. 그러므로 故今西博士의 調査報告를紹介하려고한다. 그러나 이報告는 그들의 人口乃至戶數에對한 全般的調査가 아니며 또 最近의 調査가아니나마 于先여긔들어 이問題에關心을가지는 諸賢의 參考에供하고저한다. 要컨대 最近에 잇어서는 그들은 諸般社會的情勢 卽世運의進展, 朝鮮內地人과의 交涉等의 影響으로말미암아 漸次, 朝鮮內地人에 同化되어가는 傾向이며 今日에잇어서의 純全한在家僧의 主要住居地는 富平郡下南碩寺, 穩城郡下月下洞, 會寧郡下魯雁洞, 靈山洞等이다. 이제 咸北一帶地方에 群居하고잇는 在家僧은 大略다음과같다고 한다.

富寧郡 富寧面 虛通洞 一九戶 一一二人
富寧郡 石幕面 金降洞 四二 一七五
會寧郡 八乙面 靈泉洞 四七 二八五
昌斗面 茂山洞 七○ 四二一
豊山洞 一八 一二六
靈山洞 一○ 七三
會寧郡 昌斗面 蒼苔洞 五五 三八五
鍾岩洞 九二 六八四
漁雲洞 六八 二九八
會寧郡 碧城面 大德洞 三○ 一○八
鍾城郡 豊谷面 豊溪洞 寺洞 二八 一五四
穩城郡 桑浦面 豊判洞 烏啼洞 五二
美浦面 月波洞 映月寺 五三 三○九
豊橋洞 諸峰 一○ 六五
穩城面 周源洞 鳩岩 一三
慶興郡 上下面 松上洞 普賢谷 一○ 六三

以上은 在家僧의 分布를 大略말한것이요 그後 多少의 變動이 잇엇다는 點을 充分 諒解하여주기바라는바이외다. 그리고 比較的 最近의 報告에依하면 茂山地方一帶에 잇어서는 그數爻가 漸次減少하여지고 그勢力이 逐年衰弱의一路를 밟는다고 傳한다.

다음에는 그들의 習俗에對하여 그大綱을 말한다면 그들은 職業으로서는 農業(火田)을 爲主하나 그居所를 殆히 山嶽重疊한 深山幽谷에 擇하는關係上 그土地가狹小하고 또地味가 瘠薄하여 豊足한生活은 到底히 期待할수 없는 狀態이다. 그리고 平時에는 黃紙를製造하여 公私 文書用에 供한다. 그리고 그들은 社會的 地位는 最下階級에 屬하며 一般平民과의 通婚은勿論 甚至於 交際까지못하는 狀態이다. 또 各其家庭에는 佛像佛具가없고 但[1]只 部落外에 寺院을建立하여 各其守護의任에 服한다. 그들의 衣服制度는 어떠할까? 卽그들은 婦女子의裝身具, 衣服의 貌樣等은 距今約三十年前의 朝鮮內地人의 婦女子의그것에 恰似하다고 傳한다. 그食事는 僧侶의 行世를하면서도 肉食을不禁하며 그住居를 深山幽谷에擇하는 點은그들의 어느部落에가든지 第一눈에먼첨뜨이는事實이라한다.

이제 冠婚喪祭의 儀式에잇어서 그들의習俗을 살펴보기로하자. 그들은 冠婚喪祭의場所에는 招請의有無를勿論하고 全家族이 參席한다고한다. 따라서 欽定滿洲源流考에보이는,

『女眞飮宴, 賓客盡携親友而來, 相近之家, 不召皆至…』라한 이記錄은, 在家僧의女眞族由來說에만흔興味를 加함을알겟다. 只今 冠婚의習俗에 對하여, 于先 말한다면 在家僧은 自己以外의 他族과는絶對로 通婚을하지아니하고 嫁娶時에는 牛馬를使用한다고한다.

또 그다음 喪祭의習俗을보건댄 一律로火葬을하며 그遺骨은 그것을粉碎하며 五方에散布하며 人間은죽으면 靈魂은釋尊의 側近에歸依하는것이라고 確信하는 關係이라고한다.

그다음 이在家[2]僧의習俗에 對하여 金基哲氏는 그의著『關北大觀』 中에서 詳細論述한바잇거니와 只今 그大要를 紹介한다면 다음과같다. 이記錄에 依하여, 在家僧의 由來와 그들의 日常生活의 全貌가 더욱 鮮明化할 것이다. 卽,

그들은元來, 女眞族의 歸順한種族이라하야, 一般이 그들을 奴隸視하며, 그들은 部落全體의 共同寺刹을建設하여, 部落全體가奉祀하나, 佛經을 讀하는 者없고, 但[3]只 佛前에 禮拜할뿐이며, 그들은元來, 姓名을 가지지아니 하엿으나, 近來에는, 任意로 姓名을 지여 使用하며, 또, 在家僧을 僧軍이라고하는 傳說이잇으나, 何等의 實蹟이없고, 武器를가진 形跡도없다한다. 또, 在家僧은 音聲과 姿態가 朝鮮內地人과달너, 逃亡은 極難하다하며, 그住居의入口에는 반드시 石墻을 設한다. 이것은 他部落과 區別함이그目的이며, 萬一그區域을 넘어서 居住하면, 朝鮮內地의 兩班에게, 捕獲되어, 奴隸가되는 事實等을 紹介하엿다.


四, 結言

以上에잇어서, 朝鮮北境一帶에 蟠居하여, 一種特殊階級으로서時代의風潮를超越하고, 殆히, 原始的生活을 營爲하고잇는 在家僧에 對하여, 所見의一端을 披瀝하엿으나, 現在에잇어서는, 아즉 그正體를[4] 究明斷定할 何等의根據가 없는故로, 그斷案은 保留하거니와, 자못, 北境에 이러한 特殊部落이存在하여, 어떠한意味에잇어서나, 이問題는 朝鮮學徒의 當面한 重要硏究對象[5]의 하나임을 알어두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最後에, 이在家僧에 對한 槪括的私見을 披瀝하여둔다. 卽, 在家僧은 그種族問題에 잇어서는 女眞遺族이라고보고십흐며, 그들이 今日과같은生活을 營爲하며, 在家僧이라는 指稱을받는 動機에 對하여는, 逐利興商을圖謀하는 女眞人이 그利害關係上, 北境列邑의僧徒와 結託하여, 官憲의 監視를避하고저 하엿는데, 그 原因을 차즐수가 없을가생각한다. (끝)



  1. 원문에는 單으로 되어 있다.
  2. 원문에는 家자가 빠져 있다.
  3. 원문에는 單으로 되어 있다.
  4. 원문에는 ‘을’로 되어 있다.
  5. 원문에는 衆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