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단군론 최남선.pdf/5: 두 판 사이의 차이

HappyMidnight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HappyMidnight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페이지 본문 (문서에 끼워넣음):페이지 본문 (문서에 끼워넣음):
15번째 줄: 15번째 줄:
단군의 이름을 왕검(-儉)이라고 한 것은 평양의 옛 이름인 왕검(-險)의 검(險)자를 사람인(人)변으로 바꾼 것이다. 이 전설은 불법 동류<ref>인도의 석가모니불이 제자 마하가섭에게 부촉한 正法眼藏이 西天 28祖와 중국의 6祖를 거쳐 한국의 승려에 의해 해동으로 전래되어 한국이 석가불 正法의 主處라고 자임한 전승을 불법동류설이라고 한다. (朴胤珍, 〈신라말 고려초의 '佛法東流說'〉《한국중세사연구 제21호》(2006.10) 222쪽 참조.</ref>의 후에 승려들의 날조로서 나온 망언이요, 조선의 고전이 아님은 한눈에도 명료하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천왕 21년 조(條)의 “평양성을 쌓고 백성 ‧ 종묘 ‧ 사직을 옮겼다.”에 이어서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땅이다”라고 한 것은 왕검을 여러 선인들의 평전 중의 인물로 보고, 개국의 태조라고는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선인의 땅이라고 한 것이니 짐작할 만한 서법이다.
단군의 이름을 왕검(-儉)이라고 한 것은 평양의 옛 이름인 왕검(-險)의 검(險)자를 사람인(人)변으로 바꾼 것이다. 이 전설은 불법 동류<ref>인도의 석가모니불이 제자 마하가섭에게 부촉한 正法眼藏이 西天 28祖와 중국의 6祖를 거쳐 한국의 승려에 의해 해동으로 전래되어 한국이 석가불 正法의 主處라고 자임한 전승을 불법동류설이라고 한다. (朴胤珍, 〈신라말 고려초의 '佛法東流說'〉《한국중세사연구 제21호》(2006.10) 222쪽 참조.</ref>의 후에 승려들의 날조로서 나온 망언이요, 조선의 고전이 아님은 한눈에도 명료하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천왕 21년 조(條)의 “평양성을 쌓고 백성 ‧ 종묘 ‧ 사직을 옮겼다.”에 이어서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땅이다”라고 한 것은 왕검을 여러 선인들의 평전 중의 인물로 보고, 개국의 태조라고는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선인의 땅이라고 한 것이니 짐작할 만한 서법이다.
{{Multicol-section|line=1px solid black}}
{{Multicol-section|line=1px solid black}}
하고,<東國通鑑(동국통감)>이 外紀(외기)에라도 이것을 올린 것은, 僧徒(승도)의 妄說(망설)을 歷史(역사)(상)의 事實(사실)로 看做(간주)한 것이라고 難(난)하고, 다시 後世(후세) 僧徒(승도)으 妄說(망설)대하여 억지로 理解(이해)를 下(하)하려 함은 甚(심)히 無謂(무위)한 일이라고 斷(단)하였으니, 이는 실로 壇君(단군)이 日本(일본)의 學界(학계)에서 턱없는 除斥(제척)만나던 最初(최초)의 動機(동기),(인)하여 朝鮮(조선)으로 하여금 歷史的(역사적) 無頭鬼(무두귀)작하게 하여, 마침내 全東亞(전동아)文化(문화)의 淵源(연원)까지를 오래도록 䵝昧(알매)의 域(역)에 投(투)하던 始初(시초),(씨)의 모처럼 큰 공적도 이 錯見(착견)하나를(상)할 만한지가 의심스럽다 할 밖에 없음은 못내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고 東國通鑑이 外紀에라도 이것을 올린 것은 僧徒의 妄說을 歷史上의 事實로 看做한 것이라고 難하고, 다시 後世僧徒 妄說에 對하야 억지로 理解를 下하려 함은 甚히 無謂한 일이라고 斷하얏스니 이는 실로 壇君이 日本의 學界에서 턱업는 除斥을 맛나든 最初의 動機요 因하야 朝鮮으로 하야금 歷史的無頭鬼를 作하게 하야 마츰내 全東亞文化의 淵源ᄭᅡ지를 오래도록 䵝昧의 域에 投케 하든 始初니 氏의 모처럼 큰 功積도 이 錯見한아를 償할 만한지가 의심스럽다 할 밧게 업슴은 못내 遺憾스러운 일이다.(一)
{{Multicol-break}}
{{Multicol-break}}
하고,<東國通鑑(동국통감)>이 外紀(외기)에라도 이것을 올린 것은, 僧徒(승도)의 妄說(망설)을 歷史(역사)上(상)의 事實(사실)로 看做(간주)한 것이라고 難(난)하고, 다시 後世(후세) 僧徒(승도)으 妄說(망설)에 대하여 억지로 理解(이해)를 下(하)하려 함은 甚(심)히 無謂(무위)한 일이라고 斷(단)하였으니, 이는 실로 壇君(단군)이 日本(일본)의 學界(학계)에서 턱없는 除斥(제척)을 만나던 最初(최초)의 動機(동기)요, 因(인)하여 朝鮮(조선)으로 하여금 歷史的(역사적) 無頭鬼(무두귀)를 작하게 하여, 마침내 全東亞(전동아)文化(문화)의 淵源(연원)까지를 오래도록 䵝昧(알매)의 域(역)에 投(투)케 하던 始初(시초)니, 氏(씨)의 모처럼 큰 공적도 이 錯見(착견)하나를 償(상)할 만한지가 의심스럽다 할 밖에 없음은 못내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고, 《[[:w:동국통감|동국통감]]》이 外紀(외기)에라도 이것을 올린 것은, 僧徒(승도)의 妄說(망설)을 歷史(역사)上(상)의 事實(사실)로 看做(간주)한 것이라고 難(난)하고, 다시 後世(후세) 僧徒(승도)으 妄說(망설)에 대하여 억지로 理解(이해)를 下(하)하려 함은 甚(심)히 無謂(무위)한 일이라고 斷(단)하였으니, 이는 실로 壇君(단군)이 日本(일본)의 學界(학계)에서 턱없는 除斥(제척)을 만나던 最初(최초)의 動機(동기)요, 因(인)하여 朝鮮(조선)으로 하여금 歷史的(역사적) 無頭鬼(무두귀)를 작하게 하여, 마침내 全東亞(전동아)文化(문화)의 淵源(연원)까지를 오래도록 䵝昧(알매)의 域(역)에 投(투)케 하던 始初(시초)니, 氏(씨)의 모처럼 큰 공적도 이 錯見(착견)하나를 償(상)할 만한지가 의심스럽다 할 밖에 없음은 못내 유감스러운 일이다.
{{Multicol-section|line=1px solid black}}
{{Multicol-section|line=1px solid bl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