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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紅巾賊) 괴수 장해림(張海林)은 강부인(康夫人)이 딸아 바치는 술을 한숨에 들이키고

『안주를 어째 아니 가져와.』

하고 소리를 지른다.

방 밖에 일상 등대[1]하고 있는 소해[2]가 괴수의 질자배기[3] 깨지는 소리같은 음성을 듣고 몸을 한번 바르르 떨고는 주방으로 달음질을 쳤다.

『장군께 바칠 안주 좀 얼른 주.』

이렇게 동독[4]을 해서 가지고 나온 안주란 새끼 돼지를 통으로 구은 것이었다. 어른의 토시짝만한 애 돼지 몸이 간장을 발라가며 구워서 검붉은 빛으로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있다.

소해는 큰 쟁반에 그 것을 담아 가지고 눈높이에 까지 번쩍 처들어 바치고 괴수의 방문 밖에 이르렀다. 가면서 몇 번이나 침을 꿀떡꿀떡 삼키었다. 나도 언제나 이런 돼지를 통으로 먹어보나 하고…….

『이놈아 그걸 먹기 좋게 저며 오지, 저런 무지한 놈이 있나.』

또 한 번 호령이다.

무정지책[5]이다. 소해는 일상 보아 오기를 장군님들이 새끼 돼지를 먹을 때는 으례히 통으로 갖다 놓고 뜯어 먹거나 베어 먹거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도 무심히 그대로 왼통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재하자[6]가 장군께 말대답하는 것은 첫째 군률이 용서 않는 것은 무식한 소해인들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울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그것을 들고 나가려고 하는 것을 강부인이 은쟁반에 구슬이 구르는 듯한 고운 음성으로

『소해야 이리 가져온.』

하여 다시 불러들이며 괴수를 바라보고

『이것을 저며 자시면 무슨 맛이 있어요. 이것은 이렇게 자셔야죠.』

하고는 소해의 손에서 쟁반채 받아 가지고 새끼돼지 곁에 놓아 온 식도를 들어 가슴패기에서 하복부까지 한 일자로 한숨에 내리 갈라버린다.

복부로서는 하얀 김이 뭉깃뭉깃 나오고 동시에 익어진 창자의 육취가 코를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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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괴수는 물끄러미 강부인의 하는 양을 바라본다.

얼굴을 보면 벌레 한 마리 죽는 것도 보지 못할 듯한 상냥하고 고운 얼굴이오 , 음성을 들어보면 남에게 큰 소리 한마디 잘 하지 못할듯한 인자한 음성을 가진 여자로서 어쩌면 저렇게 무지한 짓을 하는 것일가. 설혹 죽은 것일지라도 돼지의 형체 그대로를 가진 것을 단 한칼에 배를 가르다니.

장괴수는 강부인에게 대한 애정이 일시에 식어지는 것과 같았다.

장괴수는 다른 장수와 달라 자기의 직업과는 아주 정반대의 반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일찌기 부모를 여이고 어느 절에 소승으로 들어가서 다년 목탁소리와 풍경소리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다가 그 절이 어느 해에 산적에게 약탈을 당하여 당우(堂宇)가 불타버린 후에 그 역시 환속을 하여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필경 흥건적 괴수 한 사람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명을 초개같이 보는 그들 가운데서도 이상한 성격의 사람으로 을 받아 한편으로는 그의 지략을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백정생부처」라는 긴 별명으로 조소를 받는 터이었다.

그러한 이중성격자(二重性格者)인 장해림은 술을 그리 많이 먹지 않는 대신 계집을 좋아하였다.

그러한 성격이 고려 태생의 강부인을 삭풍이 늠렬한[7] 금주(金州) 산성에까지 끌고 오게 한 것이었다.

강부인은 고려(高麗) 서울 개경(開京)에서 이조(吏曹) 고직(庫直)[8]으로 있는 하상유(河上裕)란 자의 아내이었다.

때는 공민왕(恭愍王) 십년 시월, 홍건적은 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 무주(撫州) ― 무주란 고을은 지금의 영변 근처 ― 등을 침략하여 성을 점령하고 장구하여[9] 안주를 쳐 서경을 점령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이 패보를 받고 당황망조하여 평장사 김용(平章事 金鏞)으로 원수를 삼아 이 적군을 토벌케 하였지마는 파죽지세로 쳐들어오는 십만 대군의 예봉을 막아낼 장비가 없어 김용 이하 여러 장수는 단기로 도망해 버리고 적기는 도성 가까이 쳐들어 오게 되매 공민왕은 급거히 난을 안동 땅으로 ― 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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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과 장수를 잃은 도성의 주민들은 한개 무력한 양(羊)의 무리에 지나지 아니 하였다.

홍건적은 칼에 피칠 하지 않고 개경을 점령하고 여기서 수개 삭을 묵고 있는 동안 갖은 행패를 다하였다.

불쌍한 주민들 부자거나 , 가난하거나 한 집도 빼놓지 않고 그들의 약탈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다. 전곡은 오히려 둘째이었다. 얼굴이 반반한 아녀자로 그들의 수욕의 희생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도망하려니 성문을 굳게 지키어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으려니 이 약탈과 봉욕[10], 주민들은 진실로 산 지옥에 빠지고 만 격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여자 중에는 교묘히 은신을 하여 봉욕을 면한 사람도 없지는 않았지마는 주민 중에도 적군에게 아첨하여 이런 것을 고자질하여 기어코 봉욕을 시키고 그 대신 자기 일신의 안온을 도모하는 자가 있었다.

이러한 간악한 인물이야말로 어느 시대 어느 곳에든지 반드시 있고야 마는 것이다.

이조 고직이 하상유의 아내는 불행히 미인이었다.

아내가 미인이라고 그것이 불행될 리는 없는 것이지마는 이러한 시절을 당하고 보니 미인 된 것이 불행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여느 때에는

『제 ― 기 내 참 천지 조화도 괴상하지. 억박고석에다가 사람이나 똑똑한가. 평생 가야 고직이를 면치 못할 위인에다가 그런 계집을 점지하다니.』

『허어 저 자식 또 생강짜로군. 오늘도 봤니?』

『차라리 눈에나 띄지 말지. 오늘도 그 집 담 뒤를 지나려니까 김장을 하느라고 부산한 모양이데그려.』

『그래?』

『그래 아니 담으로 슬쩍 넘겨다 보지 않었나.』

『그게 못쓴단 말야 이 자식아. 대낮에 남의 집 담은 왜 넘겨다 보는 거야.』

『안 보고 배기겠던가. 담 안에서 종달새 지저귀듯 하는 계집의 음성이 나는데, 그래 부랄 달린 위인으로야 그냥 지나?.』

『그래 어서 이야기나 허게.』

『쓱 넘겨다 보니까 팔을 걷어 부치고 배추를 씻는데 팔뚝이 어찌 흰지 배추 줄거리보다 더 희겠지. 그러구 수건으로 허리를 질끈 졸라맨 폼이 여보게 그대로 꿀떡, 어이』

하고 말하던 자는 어깨를 으쓱하고 자라 목을 만들며 혀를 내민다.

『저 자식 저러다가 정말 미치겠어.』

『이 자식아 나는 미치더라도 너나 행여 상사병 들릴라.』

『상사병은 틀렸네. 짝사랑은 될른지 모르지만.』

『하여튼 사람 죽이게 잘 생겼어. 담 넘어서 사람이 넘겨다 보는 줄 알면서도 새침을 뚝 떼고 더 아양을 부리고 있겠지. 사람 죽이더라. 그런 계집하고 하룻밤만 살아봐두 원이 없겠더라.』

『자식두.』

『이따 이녀석아 너는 안 그럴 테야? 더 할 자식이 음흉스러워서 아닌 체 하지.』

이러한 평판을 듣던 하가의 아내 강씨도 시절이 시절이라 요즈음 와서는

『여보게 하가의 아내는 어찌 됐다든가.』

『어디 가서 숨었는지 도무지 형용을 안한다데 그려.』

『잘 생긴 것두 화근이야.』

『서방 작자의 꼴 좀 보지. 요즈음 바싹 말랐데 근심이 돼서.』

『안 그러겠나? 예쁜 마누라두 이런 땐 되려 걱정이야.』

『그렇지만 끝내 성할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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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뒷공론을 듣게 되었다. 그러더니 아닌게 아니라 끝내 성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이조 서리로 있는 자 하나이 자기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괴수의 한 사람인 장해림에게 곡간지기 하가의 마누라가 천하의 일색이란 것을 고자질하였다.

물론 그가 이것을 고자질하게 된 이유에는 자기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기에도 있었지마는 또 하나는 강씨 부인에게 뜻을 두고 불의의 야욕을 채우려다가 서방 작자에게 눈치를 채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숙념[11]도 있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 적도들이 이 개경을 버리고 다시 도망해 나가게 되는 사흘 전 일이었다.

사흘만 참아 주었더면 강씨 부인의 기구한 생애도 없었을 것이고, 남편 하가의 비극도 일어나지 않고 말았을 것을 몹쓸 놈은 이조 서리 그놈이었다.

강부인의 소식을 들은 장해림은 주린 범 같이 그를 요구하였다.

물론 그들이 바라는 바로 아니 될 것이 없는 때이라, 강부인은 남편 작자가 땅을 두드리며 통곡하는 광경을 뒤로 하고 장해림의 본진으로 끌려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장해림은 놀랐다 강부인을 . 한번 본 장괴수는 그의 미모를 기뻐하였다느니 보다 놀랐다는 것이 적절한 형용일 것이다.

그는 그날로 강부인을 자기 곁에서 촌시[12]를 내놓지 않았다.

남편 하가는 친구란 친구, 상관이란 상관 집을 돌아다니며 울며 불며 아내 강씨를 어떻게 해서라도 빼어 내 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허사이었다.

친구나 상관이나 누구를 물론하고 겉으로는

『가여운 일일세.』

하고 위로를 하지마는, 돌려 세워 놓고는

『글쎄 어림없는 사람이지, 지금 이 지경에 뺏긴 계집을 도로 어떻게 찾아낼 도리가 있단 말여.』

하고 도리어 청하는 사람을 그르게 아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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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의 의병은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관군과 어울리어 개경 적군을 소탕코자 쳐들어 왔다.

그 중에도 이성계 장군이 통솔하는 이천명의 정병은 선봉이 되어 개경에 박두하였다.

개경에 두류[13]한지 수삭에 술과 계집에 전의를 잃은 홍건적은 이제 다시 더 싸울 용기가 없었다.

그리하여 적도들은 마치 머리를 잃은 송사리떼 모양으로 개경을 내던지고 도망하였다.

이때 처녀의 몸으로, 또는 유부녀의 몸으로 그들에게 끌리어 도망하는 수효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는 것도 결코 허황한 소리가 아니었다.

장괴수 역시 물론 강씨 부인을 이끌고 도망하였다.

한번 밀리기 시작한 홍건적은 다시 회군하여 자웅을 결할 힘이 없어 제각기 하루라도 빨리 강을 건느려고 눈을 흡떴다.

이리하여 장괴수 역시 강씨의 손목을 끌고 개경을 탈출한지 이십일만에 부하 수백명과 이 금주 산성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다시 장졸을 모아가지고 이번에는 원나라를 들이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경에서 도망해온 패군이라 할지라도 사기는 조금도 저상되지[14] 않았었다. 원래 개경을 습격한 것이 고려온통을 들이마시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원래 적도인지라 도처에서 금품을 약탈하고 부녀를 간음하는 것이 목적이니 나라를 세우거나 뺏거나 하자는 커다란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홍건적의 최고 괴수라고 할만한 유복통(劉福通)이란 자는 원나라를 뒤집어 엎자는 커다란 뜻이 있었겠지마는 부하 군졸에 이르러서는 대개가 토비의 무리들이라 아무런 주의 줏대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이번 개경의 실패를 실패로 생각하지 않는다.

수삭 동안 평안히 놀다가 왔다고 생각하는 터이다.

그러므로 이로 해서 그들의 사기가 저상되었다고는 볼 수가 없다.

더구나 장괴수는 극히 만족하였다.

금품보다도 강씨 부인을 얻은 것이 큰 기쁨이요 만족이었다.

그의 미모는 이러한 무미한 생활에 젖은 장괴수의 가슴에 일맥의 보드라운 위안을 주는 보배이었다.

그런데다가 근자에 와서 더욱 그를 기쁘게 한 것은 강씨 부인의 태도이다.

그는 처음 끌려 올 때는 그래도 다소 고향을 그리워하여 침울한 낯을 하는 때가 가끔 있더니만 요즈음 와서는 그런 내색은 조금도 없고 괴수의 아내 생활을 지극히 만족히 여기는 빛이 농후하여졌다.

이들의 생활에 차차 익어가고 그리고 또 괴수의 아내라는 자긍과 부하들의 존경에 대한 허영이 이제 완전히 강부인의 머리를 지배하며 이 생활이 고향의 생활보다 호강이라는 생각을 먹게 되었다. 이러한 눈치를 짐작하는 장괴수는 뻔히 어떻게 대답할 줄을 알면서도

『여보 부인 고향 생각이 나지 않소?』

하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강부인은

『고향 생각을 하면 진저리가 나는걸요. 누가 가서 그 가난한 살림을 다시 하게요.』

하고 남의 말하듯이 하고 나서

『왜 인제 아마 장군은 날 내버리시려고 하시는 말씀이구려.』

이렇게 건성으로 비꼬으기까지 하였다.

『버리긴 왜 버려 이것을 버리고 난 무슨 재미로 살게.』

하고 귀여워서 못 견디는 듯이 강부인의 팔을 잡아다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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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었다.

워낙이 몹씨 추운 이 땅의 겨울, 더구나 지난해 눈이 몹시 와서 길로 쌓인 것이 얼어 붙어서 그 위를 스쳐오는 바람은 살을 에이는 듯하였다.

이름만이 봄이지 아직도 엄동이었다.

그러나 정월 명절이 다 지나가지 않은 이 산성에는 술의 봄이 왔다. 오늘도 술 내일도 술, 술로 새고 술로 저물었다.

추위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군졸들은 화톳불을 여기 저기에다가 지펴놓고 그 화톳불을 중심으로 술을 마셨다.

평소에는 술을 많이 먹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괴수들도 정월 보름까지는 무제한으로 내버려 두는 법이었다.

정월 열 이튿날 밤, 달이 꽤 밝은 밤이었다.

화톳불 가에 둘러 앉아서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고 있던 군졸 하나이

『저게 뭐야』

하고 턱으로 저편을 가리킨다.

술에 취해 몽롱한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쏠린다.

『웬 놈이야.』

달빛에 비취인 것은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한 개의 사람이다.

무엇을 입었는지 모르되 하여튼 동료는 아니다.

수상한 인물 !

간자(間者)?

그들의 머리에는 차디 찬 의심이 번개같이 스친다.

『누구냐?』

소리를 질러도 아무 대답이 없다. 다만 이편을 향하여 걸어온다.

수상한 인물로 이 편 사람에게 들켰으면 의례히 도망을 할 것인데 이것은 웬 작자인지 이리로 걸어온다.

그러나 그것이 더 수상도 하고 무섭기도 한 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럿은 우 일어나서 그 수상한 인물을 둘러쌌다.

『누구냐?』

『네, 수상한 인물이 아니올시다. 멀리 고려 개경에서 찾아온 놈이올시다. 여기가 장장군이 계신 산성이오니까.』

아닌 게 아니라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서투른 말씨가 고려 사람이 분명하다.

그제야 여럿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오른다.

『그래 누구를 찾아 왔어?』

『장군께 뵈올 일이 있어?』

『아니올시다. 장군께 뵈올 일이 있어 온 것이 아니라, 소인은 장군께서 이리로 데리고 오신 강부인의 사촌 오라비인데 강부인을 만나 뵙고 여쭐 말씀이 있어서 머나 먼 길을 찾아 왔읍니다. 이것을 드리면 아실 것이올시다.』

하고 고이춤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서 가까이 있는 부하에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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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거면 옳아, 먼저 장군께 아뢰고 나서 부인께 기별해 드리는 게 옳지?』

『글쎄.』

『무얼 그럴 것이 있나, 고려 사람이 분명하고 사촌 일가 되시는 분이라는데 먼저 부인께 아뢰게 그려. 부인께서 어련히 장군께 말씀하실라고.』

군졸들은 종이 조각 하나를 가지고 의논이 분분하던 끝에 부인께 먼저 아뢰는 것이 마땅하다는 설이 많아서 그중의 하나가 그 종이 조각을 들고 산성 내아로 달음질하여 갔다.

그 군졸은 가면서 이런 상상을 하였다.

이 종이조각을 바치면 부인께서는 기뻐하시고 놀라시고 그리고 곧 공손히 모셔 들이라는 분부를 내린 후에 필연 우리들까지에라도 다소의 행하[15]가 계시라라.

술 취한 몸에 괴로움을 모르고 꽤 동안 뜬 내아로 달음질하여 들어가며

『부인께서 반가워하실 소식을 가지고 왔으니 어서 전갈하슈.』

하고 소리를 지른다.

시비는 그 소리와 그 꼴을 보고 역시 반색을 하며

『무슨 소식.』

하고 종이조각을 받아 가지고 부인의 방으로 종달음질을 쳤다.

『고려 개경에서 부인의 사촌되시는 분이라고 하시는 분이 이 편지를 들고 산성으로 올라 왔답니다.』

『사촌?』

하고 수상한 눈으로 그 종이 조각을 받으며 속으로

『내게 웬 사촌인가.』

하고 그 종이 조각에 쓰인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개경에서 통용하는 독특한 이속[16]의 글로 한 두어줄 무엇이 적혀있다.

그것을 읽고 난 강부인은 안색이 싹 변하여서 종이조각을 든 손이 약간 떨리었다.

극히 짧은 시각이었지마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실룩실룩하고 만다.

밖에서 하회를 기다리는 군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거니와, 기쁜 소식이란 말에 무엇인지를 모르는 대로 공연히 기뻐서 가지고 들어갔던 시비는 너무나 예기[17] 외의 부인의 태도에 공연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사람이 문밖에까지 와서 있다더냐?』

『성문 밖에 와서 대령하고 있다나 보아요.』

『그럼 곧 나가서 그놈을 결박하여 하옥하라고 그래라.』

시비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만일에 고향에서 온 반가운 손일진댄 결박하여 하옥시킬리 만무한 일이 아닌가.

『어서 빨리 하옥하라고 그래.』

머뭇머뭇하고 서서 있는 시비를 강부인은 이렇게 소리를 꽥 질러 꾸짖는다.

시비는 모으로 방문 밖으로 튀어 나와서 고개를 기웃둥하며 대청 밖으로 걸어나온다.

이것은 과연 누구이던가?

개경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장괴수에게 빼앗기고 주야로 눈물로써 세월을 보내던 하상유 그이었다.

그는 홍건적이 개경에서 퇴군하여 나가기 전날까지 사방으로 돌아 다니며 자기 아내를 구해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홍건적이 퇴군할 때에 애처 역시 그들에게 끌리어 가는 것을 보고야 완전히 절망의 구렁이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땅을 굽어 저주하였다.

그렇지마는 아무리 저주하고 울고 한들 붙들려간 아내가 돌아올 리는 만무하였다.

어떤 친구는,

『여보게, 오랑캐놈들에게 잡혀간 아내를 생각하면 무얼 하나. 찾아 온댓자 몸은 더러워진 사람이 아닌가. 그러지 말고 다시 장가를 들 생각이나 하게.』

하고 위로도 아니오 야유도 아니고 충고도 아닌 말을 권하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마는 하가는 웬일인지 아내에 대한 애착을 끊을 수가 없었다.

얼굴만이 예쁘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자기의 온 생활을 아내를 중심으로 해 왔고 또 아내 자신 역시 오랑캐에게 붙들려 간 것을 설어워하여 주야로 남편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을 일을 생각하매 가슴이 아프고 뼈가 저리는 것이었다.

아내는 필경 자살할는지도 모른다.

죽기 전에 한번 만나서 서로 원통한 서회(叙懷)[18]나 하였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이러한 생각으로 하가는 집과 세간을 말끔히 팔아서 노비를 장만하여 가지고 개경을 떠났다.

홍건적이 간 곳이면 하늘 끝 닫는 데까지라도 쫓아 가서 기어코 한번 만나 보리라.

이리하여 그가 압록강을 건넌 후에 풍편에 얻어 들은 말이 장괴수는 지금 금주산성에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기뻐서 날뛰듯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허위단심[19]으로 이 금주산성에 다달은 것이었다.

그는 성문 밖에서 종잇조각을 먼저 부인께 드리어 달라고 하고, 딴은 아내가 남편의 필적을 보게 되면 반드시 발바닥으로 뛰어나와 자기의 손목을 붙들고 통곡하리라고 믿은 까닭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매 하가는 성문 밖에서 하회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가슴이 울렁거리며 몸이 떨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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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갔던 군사가 달음질하여 나온다.

『어떤 하회?』

여럿의 시선은 그리로 쏠리고 하가 역시 가슴을 두근대며 전갈을 기다리었다.

『여보게 이리들 좀 와.』

달음질하여 오는 군사가 여러 동료를 보고 외친다. 여럿은 그리로 마주 달려가서 전갈 군사를 둘러싸고 무엇을 잠간 수군수군하더니 별안간 와 하고 하가에게 달려들어 잡담 제하고 결박을 하는 것이었다.

하가는 꿈인가 하였다.

발바닥으로 뛰어 나올 아내 대신 결박이란 어인 일일고.

『여보 날 어쩔라고 이러우 내가 무슨 죄요?』

『죄 있고 없는 것을 우리가 알아? 분부가 결박하옥하라니 그대로 하는 게지.』

그 순간 하가는

『옳지, 이것은 장괴수 놈의 짓이로구나.』

『내가 마누라를 뺏어갈 양으로 온 것이 아니다. 한번 얼굴이나 보면.』

『무어 어째, 사촌이라더니 니가 부인의 전 남편이냐?』

하가는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숨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흥, 덜 된 자식.』

여럿의 콧웃음 소리가 난다.

『너의 아내란 분께서 너를 하옥시키라는 분부를 나렸어, 이 자식아. 짝사랑도 분수가 있지, 정신을 좀 차려라.』

여럿은 하가를 끌고 가면서 이렇게 조소를 한다.

아 ─ 아내가?

귀밑머리 마주 풀고 십년을 살아온 아내가 수천 리 먼 길을 찾아온 남편을 하옥?

하가는 천지가 아득하였다.

『정말이냐?』

하가는 이를 악물고 이렇게 소리를 높여 부르짖었다.

『널 속여? 못생긴 자식』

여럿이 비웃는 소리를 귀 밖으로 하가는 비분의 눈물을 흘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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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의 그 놈이 이 먼 데까지 찾아 왔으니 어떻게 해요. 배암 같은 녀석.』

『몇 해나 같이 살은 남편이냐?』

『십 년이나 살았지요.』

『어지간히 네 생각이 나던 게로구나. 그래 먼 데까지 찾아 왔으니 한번 얼굴이나 보여주지.』

『싫어요. 싫어요. 난 장군 밖에 모르게 된 계집이니까.』

하고 아양을 떨고는,

『하옥을 시켰지요.』

『그래 어찌 해 달라는 말이냐. 내 쫓아버리지.』

『죽여 주셔요.』

『죽여 달라?』

『죽여 버려야지 살려 두면 일상 께림직해서 쓰겠어요?』

장괴수는 아무 말이 없이 무엇을 한동안 생각하고 있다.

『뭘 그리 생각하셔요.』

『아니, 그럼 당장에 죽여 버리자.』

하고 괴수는 까닭 모를 웃음을 높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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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괴수는 대하에 무시무시한 좌기를 차리고 하가를 끌어 들이었다.

『너 어째서 날 찾아 들어 왔노?』

『나는 당신을 찾은 일 없오. 아내를 보러 왔오.』

『음』

장괴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대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오늘까지 주야로 통곡을 마지 않은 것은 불쌍한 아내를 생각함이었오. 그대가 나의 아내를 내놓지 않을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로되 내가 산 동안에 한번 아내를 만나 답답한 가슴이나 말해 들리고 죽자고 여기까지 찾아 왔소.』

하가는 각오한 것이었다. 인제는 살아나갈 수 없으니 맘에 있는 대로 말이나 하고 죽자는 것이었다.

『음, 불원천리하고 애처를 그리워 오는 남편의 마음은 가긍히[20] 여긴다마는 너의 계집은 이미 전날의 네 계집이 아니다.』

『아오. 그 년의 지금의 변심을 아까서야 알았소.』

구슬 같은 비분의 눈물이 하가의 두 뺨에 흐른다.

『그러나 장군, 장군 역시 사나이면 이 내 가슴을 헤아려 알 것이외다. 나는 그 년을 죽여 점점이 씹고 싶소. 그러나,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인제야 알았소. 나는 그 년을 한번 만나 그 고은 얼굴에서 옛 나의 애처의 면형이나마 마지막으로 찾아보고 싶소.』

하가는 고개를 숙이고 느끼어 운다.

장괴수의 두 눈에도 때 아닌 이슬이 반짝이었다.

『여봐라.』

『네 ─ 이』

『부인 이리로 나오시래라.』

이윽고 강부인은 몇 시비를 데리고 대청으로 나왔다.

『네 이전 남편이 너 한번 보고 죽겠다 하니 앞으로 나서서 얼굴을 보여라.』

장괴수는 빙긋도 아니하고 엄연히 이렇게 명령한다.

그다지 독한 강부인도 몸을 잘게 떨며 수보 앞으로 나선다.

축대 아래서 얼굴을 들어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는 하가의 눈에서는 비분에 타는 불길이 사람을 쏘는 듯하였다.

『네, 이년』

하고 악을 쓴다.

『아무리 오랑캐에게 몸을 버렸을지라도 마음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니 ─네 이년, 내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백 번 살아나서 네게 원수를 갚고야 말 테다.』

강부인은 몸서리를 치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돌리어 장군에게 애원한다.

『저 놈을 어서 죽여주세요.』

十一 편집

『네 이놈 들어봐라, 너의 정경이 가긍하기로 살려 보낼가 하였더니, 너의 전 계집의 간청이 있으매 내 너의 목을 친히 버이는 것이니 그리 알아라.』

장괴수는 환도를 빼어들고 대청 끝으로 나선다.

『오 ― 죽여라. 내 이제껏 너를 원망했더니 이제는 네게 대한 원망도 미움도 없다. 얼른 죽여라.』

『음 훌륭한 쾌남아.』

장괴수는 감개무량한 듯이 잠시 대하를 내려다보더니

『얼굴을 들어라.』

하가는 고개를 번쩍 든다.

그 순간 괴수의 환도는 공중에 날라 곁에 선 강부인의 목을 찍는다.

『악!』

하고 느끼는 계집의 비명과 동시에 강부인의 목은 대하에 떨어졌다.

여럿은 전기를 쏘인 사람같이 실색한 채 꼼짝도 못 하고 있고 하가는 부지 중 벌떡 일어섰다.

『놀라지 말라. 너의 정경을 가긍히 여기어 이 요독한 계집의 목을 버인 것이다. 너의 죽음을 바라는 년이 다음날 나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것이냐.』

하고 대하로 걸어 내려와 하가의 손목을 잡는다.

괴수의 손등에 뜨거운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끝>

주석 편집

  1. 미리 준비하고 기다림.
  2. 열네댓 살의 어린 종.
  3.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질그릇.
  4. 감시하며 독촉하고 격려함.
  5. 아무 까닭 없이 책망함. 또는 그런 책망.
  6. 손아랫사람(나이나 항렬 따위가 자기보다 아래이거나 낮은 사람).
  7. 추위가 살을 엘 듯이 심하다.
  8. 관아의 창고를 보살피고 지키던 사람.
  9. 말을 몰아서 쫓아가다.
  10. 욕된 일을 당함.
  11. 숙원(宿願)
  12. 촌음(매우 짧은 동안의 시간).
  13. 체류(滯留)
  14. 기운이 없어지다.
  15.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주인이 부리는 사람에게 주는 돈이나 물건. 심부름을 하거나 시중을 든 사람에게 주는 돈이나 물건. 품삯 이외에 더 주는 돈.
  16. 마을의 풍속.
  17.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하여 미리 생각하고 기다림.
  18. 회포를 풀어 말함.
  19. 허우적거리며 무척 애를 씀.
  20. 불쌍하고 가엾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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