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7장
평양이라 하는 곳은 경성보다 기후가 육칠 일 동안이나 늦은 곳이라. 경성은 꽃이 만개하여도 평양은 비로소 꽃이 피기 시작한다. 겨우내 심한 추위에 온돌에만 칩복하였다가 화창(和暢)한 춘일(春日)을 만나면 평양시내의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한 번 이때를 타서 유쾌히 놀기를 즐길 때이라. 때는 음력으로 말하면 삼월 상순이요, 양력으로 말하면 사월 중순이라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따뜻한 듯 서늘한 듯하여 품 안에 감동되는데 만수대(萬壽臺) 아래로 멀리 대동강(大同江)을 건너서 깔려 있는 능라도(綾羅島)는 아지랑이가 가득히 끼어 아물아물 눈이 부신데, 먼 곳으로 쫓아 풀을 먹느라고 매어 있던 송아지는 맹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가 가장 심란하다. 그 소리가 그치면 다시 솔나무에서 새소리가 난다. 바람도 없건마는 수양버들(垂楊) 가지는 자주 흔들린다. 우러러보니 꾀꼬리 한 마리가 사람 있음을 보고 놀라 날아감이라.
순애와 그 모친은 각각 우산을 짚고 이곳 만수대 위로 올라온다. 그 뒤로는 계집아이 하인 하나이 궐련갑과 석류황(石硫黃)을 수건에 싸서 들고 따라온다.
순애는 내키지 아니하는 걸음으로 우산을 의지하며 간신히 만수대 위에 올라서니 볕은 뜨겁고 땀은 흐른다. 그 대 위에 노송(老松)이 두서너 개 서서 있는데, 그 그늘 아래로 들어서서 몸을 소나무에 의지하고 눈은 정신없이 대동강 흐르는 물만 바라보고 있다. 그 모친이 그 옆 잔디 위에 펄썩 주저앉았고 계집아이 하인은 이리저리로 다니며 풀꽃을 따느라고 그 옆에는 와서 있지 아니한다.
순애의 모녀 두 사람이 이곳으로 내려옴은 신랑되는 김중배가 그곳 금산은행 지배인(金山銀行 支配人)으로 그곳에 집을 건축하고 있는 터이요, 또는 경성에서 혼인코자 하나 이수일이 옆에 있음을 꺼려 아는 듯 모르는 듯 시골을 와서 성례하면 이왕 성례된 후에야 이수일이가 아무리 말을 하기로 엎친 물을 다시 담기 어려운 데에 비할 뿐이라. 김중배도 순애와 수일의 관계를 대강 들어 아는 고로 수일이가 만일 옆에 있으면 무슨 방해를 할는지 모르는 고로 순애 모녀가 시각 내로 평양으로 떠나 내려오게 함도 전혀 김중배의 계책 중에서 나온 일이라. 경성에서 떠나 내려올 때에도 김중배와 한가지로 기차를 타고 왔더라.
순애 모녀는 김중배의 용전여수(用錢如水)하는 데에 마음이 벌써 사로잡힌 바 되었더라.
소나무에 의지하였던 순애의 몸은 어느덧 소나무 뿌리 위에 주저앉았다. 순애는 심중에 쌓인 근심의 병이 지금껏 쾌복치 못하였는지 넓게 단장한 얼굴은 꽃송아리에서 떨어진 꽃잎과 같이 시들어서 기운 없는 모양 같다. 지목하여 바라보는 곳도 없이 바라보다가 스스로 고개가 앞으로 수그러지며 깜짝 놀라 간신히 무거운 고개를 들어서 쳐져 있는 나뭇가지를 치어다 본다. 순애는 무슨 생각을 하려면 반드시 아랫입술을 악무는지라, 순애는 지금도 자주 입술을 물고 묵묵하며 말이 없더니,
『어머니, 어떻게 하면 나는 좋아요?』
그림 같은 경치를 사면으로 바라보기를 마지 아니하던 모친은 이때에 비로소 고개를 딸에게로 향하며,
『어떻게 하면 좋아가 다 무엇이냐? 그러기에 너더러 처음부터 의논을 하였지, 요사이 자식들은 아무리 어미 아비라도 제게 물어보지 않고는 결단하기가 어려워서 너더러도 한 말이 아니냐? 네가 처음부터 그리 가겠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일을 지금 와서 다시 또…….』
『그는 그렇지요마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수일씨가 가엾어요. 서울서 아버지가 벌써 그 말씀을 하셨을까요, 네? 어머니.』
『아마 벌써 말씀하셨을라.』
순애는 다시 입술만 깨물고 있다.
『나는 어머니, 수일씨는 다시 보지 아니하고 바로 그리 갈 터이야요. 그러니 그렇게 하여주시오. 나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어요』
하며 목소리는 점점 속으로 들어가고 아름다운 눈에는 눈물이 치마 위에 뚝뚝 떨어진다. 손을 들어 떨어지는 눈물을 씻으려 하는 그 수건은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할 사람의 괴로움인 줄은 그 여자도 알리로다.
『네가 저렇게 수일이를 생각하고 잊지 못할 것 같으면 어찌해서 애초부터 김중배에게로 가겠다고 허락은 하였단 말이냐? 그렇게 사람의 자식이 좌우간에 결단을 하지 못하면 어찌하자는 말이냐? 지금이라도 좌우간에 꽉 마음을 결단해서 말을 하면 어디든지 한 곳은 파의를 하겠다. 나도 억지로는 김씨의 집으로 너더러 가란 말이 아니라 파의할 터이면 지금이라도 파의해야지. 그렇지만 이 지경까지 된 일을 지금 와서 파의한다기로 저기서 잘 들을까 모르겠다…….』
『아니야요, 내가 가기는 갈 터야요. 가기는 가지마는 수일씨가 암만해도 가엾어서…….』
그 모친도 수일의 일을 위하여는 주야로 생각지 아니하는 날이 없다. 그 딸 순애가 수일의 이름을 부를 제마다 자기의 마음은 스스로 범한 죄가 있어서 그 죄를 나타냄같이 생각이 든다. 그런 고로 그 모친은 이 인연이 아름다운 줄을 모름이 아니로되 진실로 안심하고 기뻐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더라. 그러나 오히려 그 딸의 마음을 위로코자 한다.
『너의 아버지께서 잘 말씀을 하셔서 수일이도 알아들어서 허락하였으면 그만이요, 또 너라도 저리로 시집가거든 일의 일은 잘 보아주려므나. 전에는 사위로 알고 있었지마는 지금부터는 수양아들로 알고 있다. 너도 수양 오라비로 알고, 이후라도 평생을 서로 신(信)을 끊지 말고 지내게 하여라. 이런 말을 들으면 수일이기로 설마…… 그리고 사나이들은 여편네와 달라서 결단성이 많으니까 한 번 결단하면 그만이지, 너같이 속을 지글지글 태우고 있지는 않으리라. 네 말은 수일이를 볼 낯이 없다고, 보지 않고 가겠다 하지마는 그것은 네 생각이 잘못 들어서 그렇다. 서로 만나서 보고 피차에 사세를 죄다 이야기하고 서로 좋은 낯으로 떠나서 이후부터는 남매의 의(義)를 맺어서 서로 끊지 않고 오래도록 정다이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벌써 사주까지 받아놓고, 혼인 택일까지 하였는데, 수일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사람이 훼방하기로 인제야 되겠느냐? 너는 벌써 김가의 집 사람이 되었다. 좌우간 오늘이나 내일은 서울집에서 기별이 있으리라.』
순애는 나무에 의지하여 황홀한 정신으로 반은 들으며 반은 생각하는데, 바람에 불려 무릎 위에 떨어지는 묵은 솔 이파리를 기운 없는 손으로 집어다가 입에 넣고 씹는 데 성너머 기자릉(箕子陵) 솔밭 속으로서 때때로 흘러 나오는 꾀꼬리 소리는 인간의 회포를 다시 돕는도다.
순애는 우연히 뒤로 돌아다보니 만수대 아래로 십여 간 동안이나 되는 광풍정(光風亭) 앞 소나무 틈으로 양복 입고 단장 짚은 일위 소년 남자가 사면을 바라보며 올라오는데, 순애는 나무 그림자를 피하여 자세히 바라보더니 누구인 줄을 짐작하였는지 얼굴이 붉어지며 몸을 벌떡 일어 칠팔 걸음 물러서며 솔나무 옆으로 몸을 피하 여 선다. 그 사나이는 점점 대 위로 올라오더니 순애 모친을 향하여,
『아, 여기 계신 것을 모르고 모란봉(牧丹峰)으로 영명사(永明寺)로만 찾아다녔습니다그려.』
지금 올라온 사나이는 금산은행 평양지점 지배인(金山銀行 平壤支店 支配人) 김중배라, 이 사람은 원래로 천성이 침중(沈重)치 못하며 일찍이 해외에 유학하여 문물(文物)의 번화함과 생활의 풍족함만 생각하고 돈 앞에는 무서운 물건도 없으며, 돈으로는 어떤 귀중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도 내 앞에 허리를 굽히게 함이라 하여 경박한 마음이 가슴에 찼던 사람이라
이날도 해외 풍속에 오래도록 습관된 마음이라, 비록 성례는 하지 아니하였으되 나의 아내는 아내라, 무슨 그날이 다다라 오기를 기다리리요. 꽃은 피고 일기는 온화한데 스스로 일어나는 흥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새로이 건축한 집에 있던 계집아이 하인을 보내어 산에서 하루 소창(消暢)코자 모시고 오라 하였던 터이라. 그 모녀는 이미 금전에 사로잡힌 한 개 동물이라 어찌 조금인들 거스르리요, 그 하인을 따라서 이곳까지 올라옴이러라.
김중배는 그 계집 하인을 꾸짖는 모양으로,
『이년, 이 마님 모시고 모란대로 오라니까 왜 여기 있어?』
『아니야요, 쇤네가 지금 그리로 모시고 가려는데 여기서 다리를 좀 쉬어 가자고 마님께서 하셔서…….』
그 부인은 황망히 계집 하인의 발명을 하여주느라고,
『다리가 아프기에 잠깐 쉬어 가려고 그랬지. 자네가 인제 올라왔으니 더욱 든든허이. 서투른 곳에서 여편네들만 다니기에 무섭더니.』
모친은 정다이 인사하며 일어나 맞는다. 순애는 그 편은 향하여 보지도 못하는데, 그 사나이는 순애의 서서 있는 나무 앞으로 가까이 나온다. 순애의 앞으로 가까이 와서 선 사람은 눈이 부시는 금강석 반지 낀 손으로, 옥으로 마구리한 상아(象牙) 단장을 짚었는데, 그 단장 끝으로는 잔디 틈으로 피어 나온 냉이꽃(薺花)을 툭툭 치며,
『왜 그렇게 피하여 섰소? 학교에 다닌 여자로서 그다지 부끄러움이 많단 말씀이요? 허허허허.』
순애는 손을 들어 입을 가리우고 웃으며 고개를 저편으로 돌리는 저음에 눈을 잠깐 들어 도둑하여 치어다보니 김중배의 눈도 또한 순애의 눈에 있다. 순애는 홀연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이키는데, 김중배는 이때의 즐거움이 이 세상에 다시 없는 듯이 순애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의 거만한 태도는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고 좌우로 내민 광대뼈와 사람인자로 다문 입술과 금테 안경을 코 위에 걸고 있는 모양은 가위 점잖은 신사인 체하는 모양이라.
『자네가 아까 계집아이년을 우리게로 보내서 이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신다기에 저년만 우리는 따라왔더니 여기 올라앉아서 보니까 참말 속이 시원한 것이 경치가 좋으이 그려.』
『그렇기 때문에 옛날부터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고 일러 오던 데올시다 그려. 그러나 오늘은 모시고 소창도 하려니와 제일 여쭐 말씀이 있어서…… 어저께서울 집에서 편지가 내려왔는데 은행 일로 급히 의논이 있으니 잠깐 다녀가라고 기별을 하였어요. 그래서 오늘밤에 떠나는 급행열차로는 떠나가서 내일 저녁으로라도 다시 떠나 내려오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어찌 보셨든지간에 따님을 허락하여 주신 바에는 어디를 가든지 제 아내올시다 그려.』
『아무렴, 그렇지. 다시 헐 말인가.』
『지금은 서로 초례는 지내지 못하였습니다마는 외국서 혼인하는 것으로 보면 혼인을 이루기 전이라도 서로 정다이 지내다가 혼인날은 따로 받아서 예식만 지내는 것이올시다. 조선서는 이전부터 고루한 습관으로 혼인 전에는 서로 보지도 않고, 말도 아니하는 것을 저는 좋다고 칭찬할 수 없습니다. 장모께서도 여기 누추한 주막에서 거처하시느니보다 이곳에도 사오십 간되는 제 집이 있으니, 그 집 안에 와서 며칠 동안 거처하시면 좋지 아니하겠습니까? 아무래도 며칠 후에는 저기 섰는 순애씨는 제집 안방 주인이 될 터이니 미리 와서 견습(見習)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허허허허.』
부인은 실없는 말로 알고 다시 대답이 없는데,
『여기 있는 집도 돈을 많이 들여서 지었답니다. 강이 가까와서 경치는 좋고 각항 물건도 서울같이 없는 것이 없고, 정만 있어서 두 내외가 살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따님은 이런 시골은 좋아하지 않지요? 아마 부모가 서울 모두 계시니까 부모를 그리워서 시골을 싫어하기도 쉽지요. 그러면 처가도 여기 한 채 사서 드리지요.』
하며 순애를 바라본다. 순애는 웃음을 머금고 말이 없는데 부인은 궐련 재를 땅에다가 툭툭 떨면서,
『아이, 말만 하여도 고마우이. 계집 사람이 남편 하는 대로 할 것이지, 좋고 싫은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따님이 아마 구경은 좋아하지요?』
『아이들이 되어서 구경이야 좋아하고 말고.』
김중배는 허허 웃으며 기꺼워 어찌할 줄 알지 못하며,
『여보, 순애씨, 순애씨가 구경을 만일 좋아하면 우리가 성례한 후에 새달쯤은 신혼여행을 하여 봅시다. 문명 각국에서는 으레 하는 일이니 신혼여행을 다만 조선 내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일본까지 건너가서 유명한 데를 구경하고 옵시다. 그렇게 해서 돈도 좀 씁시다그려. 돈은 해서 무엇하겠소? 내 말이 옳지?』
하며 순애를 돌아보아 그 대답 나오기를 요구하나 순애는 오히려 말이 없고 다만 부끄리는 웃음만 띄웠더라.
『그러나 여기서만 구경을 합니까, 경치 좋은 데가 하고 많은데요. 요너머 기자릉(箕子陵)이란 데로 가서 구경을 하시지요.』
『내야 알 수가 있나? 자네는 자세히 알 터이니 데리고 다니면서 자세히 구경을 잘 시켜주게.』
김중배는 몸을 일어서서 양복 무릎을 내리키며 백설 같은 비단 수건을 내어 옷자락의 티끌을 떨고 다시 코와 입을 씻는 화로수(花露水)의 향기로운 냄새는 근처에 편만(遍滿)하다.
순애와 그 모친은 촉비(觸鼻)하는 향기에 일시 놀람을 마지 아니한다.
『자, 나만 따라들 오셔요. 참 경치 좋은 데가 많이 있지요. 아차, 내가 잊었군! 기자릉으로 지금은 갈 터인데 거기는 예서 내려가기가 대단히 험하여 노인께서는 못 가실 듯하오이다. 장모께서는 저 계집아이년 데리고 여기 앉아 계시오면, 저하고 순애하고만 가서 구경 을 하고 올 터이니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길이 험하면 내야 참 갈 수가 있다고? 그러면 네나 가서 구경하고 오려니?』
순애는 주저한다. 김중배는 더욱 재촉하며,
『어서 가요. 사람이 왜 그리 졸하여?』
하며 순애의 앞으로 가까이 오더니 어깨를 탁 쳐서 돌려세운다. 순애는 홀연 얼굴이 취하며 처신무지하여 그 모친을 바라보니, 모친의 앞에서 남자의 난잡한 행동을 무이 여김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의 몸 가지기를 잘못한 것같이 부끄러워한다.
김중배의 심중은 이렇듯 아름다운 여자와 한가지로 옥수를 붙잡고 사람 없는 산길로 가히 수작하며 다니는 재미가 얼마큼 즐거우리요 하여 마음은 벌써 공중에서 배회한다.
『자, 어서 갑시다. 어머니께서도 허락을 하셨는데 그리 주저하고 있단 말이요.』
그 부인은 순애의 부끄리는 모양을 보고,
『왜 그러니? 가기 싫으냐?』
『아이고, 장모께서는 가기 싫으냐고 왜 물어보십니까? 가거라 하고 명령을 헙시오.』
순애와 부인은 한가지로 웃는다. 김중배는 따라서 웃는다. 이리 다투면서 일행은 그럭저럭 만수대 아래에 내려와 기자릉으로 넘어가는 곳에 다다랐는데 홀연 그 능 안으로 좇아 구두 소리가 산에 울리어 들리는지라, 순애는 사람이 있는가 하여 살펴보나 형용은 보이지 아니하고 발자취만 들리는데, 유산차로 나선 사람인지 또는 일이 있어 다니는 사람인지 분주하고 급히 무엇을 찾는 것같이 발자취가 요란하다.
『그러면 네가 같이 가서 구경하고 오너라.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다.』
순애는 간신히 나오는 목소리로,
『어머니도 같이 가셔요.』
김중배는 그 모친과 한가지로 가면 도리어 재미가 없으리라 하여, 어디까지든지 그 모친은 가지 못하게 하는 말이다.
『아니오, 어머님을 모시고 갔으면 좋기는 좋겠지마는 여기를 좀 내려다 보구료. 노인이 거기를 내려가시겠소? 그것은 구경이 아니라 곡경이 될걸 그리한단 말이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우리나 가서 구경하고 잠깐 옵시다. 장모께서는 이 다음날 이 아래 좋은 길로 다시 인도하여서 보시게 할 터이니 젖먹는 어린아이도 아닌데 어머니를 그다지 떠나지를 못한담, 허허허.』
이때 처음부터 들리던 구두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리더니 홀연 뚝 그치는지라 발자취 나던 사람은 벌써 지나감인가 하였더니, 지나감이 아니라 칠팔 간이나 동안 뜬 소나무 사이에서 발을 멈추고 이편 위에 서서 있는 일행의 행동을 엿보고 있음이라. 그러나 이편에 있는 세 사람은 누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더라.
그곳에 몸을 숨겨 있는 사람은 고등학교 모자를 쓰고 학생 양복을 입었는데 어깨에는 책 넣은 가방을 엇메었으니 그 사람은 분명한 이수일이로다.
조금 있더니 다시 구두 소리가 가까이 들리며 졸연히 그 언덕 위로 우뚝 올라서는 사람이 있는지라, 그제야 이편에 있던 세 사람은 발자취 나는 곳을 향하여 돌아보니 일개 단아한 학생이 그 옆에 와서 서더니 문득 모자를 벗고 부인을 향하여 공손히 예하며,
『지금 서울서 내려오는 길이올시다.』
순애와 모친은 경악하여 거의 사람의 정신을 잃었더라. 모친은 능히 얼굴을 보고자 하는 힘도 없고 먹먹하여 다만 눈만 둥그렇게 뜨고 있어서, 잠시는 석상(石像)같이 움직이지 못한다. 순애는 몸을 주체하기 어려워서 이 자리에서 살아 있느니보다 검불같이 쓰러져서 이 흙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난다.
생각하건대 저 두 여자의 놀람과 무서움은 자기 손으로 살해한 사람이 다시 살아와서 서로 대함과 같이 정신을 진정치 못하며 모친은 몽중에 섬어(語)하듯이,
『아이고, 자네가 내려왔네 그려.』
순애는 조금이라도 자기의 형상을 남의 눈에 띄지 않자 하여 나무 뒤로 몸을 피하였으며 두근거리는 가슴에 헐떡거려지는 숨소리를 남이 듣지 못하게 하느라고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보기도 어렵고 아니 보기도 어려운 수일의 얼굴을 수건 틈으로 조금씩 엿보며, 한편으로는 김중배의 기색을 살핀다.
김중배는 두 사람의 가슴 속에 각각 이와 같이 큰 파란이 일어남은 조금도 알지 못하고 그 집의 어떠한 친척 되는 사람이 찾아 내려옴인가 하여 별로이 의심치 아니하고 금강석 반지 낀 손으로 단장을 휘두르면서 가장 자랑이나 하는 것 같이 좌후고안(左膽後顔)하며 의기양양하다.
수일이는 벌써 그 사나이는 김중배인 줄도 알았으며 그 자리에서 서로 하는 모양도 모름이 아니로되, 가슴에 첩첩이 쌓인 말은 나중에 조용히 말할 때가 있으니 지금은 조금이라도 사색을 나타내지 아니하리라 하고 가슴이 터지는 듯한 분한 마음을 간신히 진정하고 괴로이 웃는 얼굴을 짓는다.
『순애는 여기 내려와서는 병이 좀 어떠합니까?』
순애는 그 말을 들으매 참지 못하고 가만히 수건을 입에 문다.
『응! 요사이는 매우 나은 모양이야. 한 사날만 더 지내면 아주 낫겠지. 자네는 여기까지 와서 만나보니 반갑기는 하구머는, 학교는 수유하고 왔나?』
『네, 수유가 아니라 이제부터 학교 집을 고치느라고 사날 후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틈에 잠깐…….』
이수일과 김중배의 두 사람 틈에 있는 그 부인의 신세는 비유하건대 웅덩이에 빠진 몸이 잠기지도 아니하고 빠져나오기도 어려운 때에 목숨을 살리느라고 간신히 더위잡은 풀뿌리를 조그마한 쥐가 이르러 그 뿌리를 쪼음과 같도다. 진퇴가 유곡하여 어찌할 계책이 없음을 할일 없이 마음을 가다듬어 김중배를 돌아보며,
『지금 서울집에서 사람이 내려왔으니까 불가불 주인 잡은 곳으로 내려가 보겠으니 내일이라도 또 만나세.』
『네, 그러하시겠습니다. 그러면 어서 내려가시지. 저도 내려가겠습니다.』
하고 김중배는 내려가려 하다가 다시 순애의 옆으로 가까이 나아가서 나직한 말로,
『오늘은 좋은 기회를 놓쳤으니 내일은 부디 함께 구경 다닙시다.』
수일은 눈도 깜짝이지 아니하고 그 모양을 보고 있다. 순애는 얼굴에 불을 끼얹는 듯하며 대답을 이르지 못하고 한옆으로 피하여 물러가니 김중배는 더욱더욱 가까이 쫓아오며 차마 그 옆을 떠나지 못한다.
『내 말을 알아들었지요, 부디 응?』
수일의 눈에는 화염이 일어나는 듯하며 순애의 얼굴을 주린 호랑이가 망아지를 노리듯 하고 있다. 그러나 김중배는 전연히 남의 기색은 조금도 살피지 못하고 다만 어디까지든지 아름다운 순애에게 마음을 두고 할일 없이 내려간다. 그 뒤로는 계집아이 하인도 따라간다.
수일은 그 내려가는 모양을 뒤로 바라보고 있기를 이윽히 한다. 두 사람은 수일의 의향을 알지 못하여 다시는 말도 묻지 못하고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섰는데, 다만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갈 제마다 우우 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라. 홀연 이편으로 다시 돌이키는 수일의 얼굴은 혈색은 하나도 없고 흙빛이 되어 웃고자 하나 능치 못하는 것 같아여 간신히 괴로운 웃음을 은은히 보이며,
『여보, 순애, 지금 여기서 내려간 놈이 요전에 윷판에 왔던 금강석이로군』
순애는 대답이 없고 입술만 깨문다. 그 모친은 모르는 체 하고 마침 가지 위에서 우는 꾀꼬리 앉은 곳을 찾는다.
수일은 이 모양을 보고 다시 냉기를 마지 아니하며,
『밤에 등불 아래서 볼 때에는 그닥지 않더니, 낮에 자세히 보니까 대단히 거만한 놈이다 그려. 그놈 아니꼬운 놈 같으니, 상판대기 생긴 것 하여 가지고』
『여보게.』 하며 그 부인은 홀연 수일을 부른다.
『녜.』
『그간에 우리 집에서 영감께 무슨 말씀을 듣지 못하였나? 이번 이 일로 하여서 필연 이야기가 있었지?』
『녜.』
『응, 그러하겠지. 전에는 자네가 남더러 잘잘못을 무론하고 이놈이라는 놈자 한 번 입에 올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더니 오늘은 웬일인가? 남더러 공연히 왜 욕을 그렇게 하나?』
『녜.』
『그만 어서 우리도 내려가세. 여기까지 내려오느라고 고단도 하겠고, 시장도 하겠네 그려.』
『아니오, 찻 속에서 밥은 먹었어요.』
세 사람은 산 아래로 내려가기를 시작하였는데, 순애는 뒤에 따라오고 수일은 가운데 서서 내려온다.
홀연 뒤에서 어깨를 탁 치는 사람이 있는 고로 돌아다보니 순애가 자기의 어깨 위에 무엇을 떨어준다.
『양복에 나뭇잎이 묻었기에 떨어뜨렸어요.』
수일은 비웃는 모양으로,
『응, 대단히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