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HappyMidnight/알렉산드로스 원정기

제2권

편집

제10장 이수스 전투

편집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의 군대를 정렬한 후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였고, 이후 적군의 접근이 매우 느리다고 판단하여 직접 군을 이끌고 전진하였다. 다리우스는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지 않았으며, 강가의 가파르고 험준한 지형이 많은 곳에서 방어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역에는 방책을 세워 방어선을 강화하였다. 이를 본 알렉산드로스의 병사들은 다리우스가 이미 사기가 꺾였음을 확신하였다. 마침내 양 군이 접전을 벌이게 되자,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군대를 향해 전장에서 용맹을 발휘할 것을 독려하며 뛰어난 무공을 가진 장군들뿐만 아니라 기병과 보병, 그리고 명성이 높은 그리스 용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그들을 격려하였다. 이에 병사들은 지체 없이 적을 공격하자는 함성을 외쳤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처음에는 밀집 대형을 유지한 채 적진을 향해 신중하게 전진하였다. 다리우스의 군대가 완전히 시야에 들어왔을 때도, 급하게 돌진하여 대형이 무너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사정거리 내에 들어서자,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이끄는 우익 부대와 함께 급속히 강으로 돌격하였다. 이는 빠른 기습으로 페르시아 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적 궁수들의 화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예상대로 전투는 전면적인 근접전으로 빠르게 전환되었고, 페르시아 군의 좌익이 붕괴되었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부대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다리우스 군의 그리스 용병들은 마케도니아 군의 약점을 찾아 중앙에서 특히 대형이 흐트러진 곳을 집중 공격하였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우익에서 지나치게 돌격하며 강을 건너 직접 백병전을 벌였다. 이에 따라 마케도니아 중심부의 대형이 느리게 움직이며 뒤처졌고, 험준한 강둑을 넘는 과정에서 팔랑크스(밀집 방진)의 정렬이 무너졌다. 이로 인해 다리우스의 그리스 용병들은 마케도니아 군을 강으로 몰아넣어 승기를 되찾으려 했다. 반면, 마케도니아 군은 이미 승리가 확실해진 알렉산드로스의 행운과 전설적인 팔랑크스 부대의 무적의 명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간의 오랜 경쟁 의식이 전투를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으며, 이 치열한 접전 속에서 마케도니아군의 용맹한 장수인 셀레우코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를 포함하여 120명의 용사들이 전사하였다.

제4권

편집

제7장 베수스(Bessus)의 처벌

편집

알렉산드로스는 이 모든 일을 마친 후 자리아스파(Zariaspa, 현재의 발흐)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한겨울이 올 때까지 머물렀다. 이때 파트리아(Parthia)의 총독 프라타페르네스(Phrataphernes)와, 아레이아(Areia) 지방으로 보내졌던 스타사노르(Stasanor)가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베수스(Bessus)의 반란에 가담했던 아르사메스(Arsames)와 바르자네스(Barzanes)를 포함한 반란 세력을 사슬에 묶어 끌고 왔다. 바르자네스는 베수스가 파르티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던 인물이었다. 같은 시기에 에포킬루스(Epocillus), 멜람니다스(Melamnidas), 트라키아 장군 프톨레마이오스(Ptolemy)도 도착했다. 그들은 그리스 동맹군을 바다까지 호송하였으며, 메네스(Menes)가 보내온 자금도 함께 운반했다. 또한, 아산더(Asander)와 네아르코스(Nearchus)가 그리스 용병 부대를 이끌고 도착하였고, 시리아의 총독 아스클레피오도루스(Asclepiodorus)와 부총독 메네스(Menes)도 또 다른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였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당시 주변에 있던 지휘관들과 회의를 열고, 베수스를 그들 앞에 끌어냈다. 그는 베수스가 다리우스를 배신한 죄를 강하게 비난하였고, 그의 코와 귀를 자른 후,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원로회에서 처형하도록 엑바타나(Ecbatana)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나는 이러한 잔혹한 처벌을 결코 칭찬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신체의 중요한 부위를 훼손하는 것은 야만적인 관습이라고 생각하며, 알렉산드로스가 메디아와 페르시아 왕들의 풍요로움을 모방하려는 욕망에 빠져, 피정복민들을 열등한 존재로 대우하기 시작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또한, 나는 그가 조상들이 입었던 마케도니아식 복장을 버리고, 메디아식 복장으로 바꾼 것을 칭찬할 수 없다. 그는 헤라클레스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정복자인 자신이 오랫동안 착용했던 머리 장식을 정복당한 페르시아인의 머리 장식으로 바꾼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모든 행동을 칭찬할 수 없으나, 알렉산드로스의 위대한 업적은 그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강인한 체력과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으며, 심지어 알렉산드로스보다 전쟁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아프리카(리비아)와 아시아를 항해하며 모두 정복하고, 유럽까지 더하여 세계 전체를 지배한다고 해도, 이 모든 것이 자기 절제(Self-control)의 능력이 없다면, 진정한 행복에 기여할 수 없을 것이다.

제7권

편집

제4장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 사이의 결혼

편집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아트로파테스(Atropates)를 그의 총독령으로 돌려보낸 후, 수사(Susa)로 진군하였다. 수사에서 그는 아불리테스(Abulites)와 그의 아들 옥사트레스(Oxathres)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수시아나(Susiana)를 부패하고 무능하게 통치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인도로 원정을 떠나 오랜 시간 동안 부재하자, 정복지에서 임명된 총독들은 신전을 훼손하고, 무덤을 약탈하며, 주민들에게 가혹한 폭정을 행하였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그 많은 민족과 코끼리를 보유한 왕국을 상대하며 인더스강, 히다스페스강, 아케시네스강, 히파시스강을 넘어 원정을 계속하는 동안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특히 가드로시아(Gedrosia) 사막에서의 고난이 알려지면서, 이 지역의 총독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점점 의심이 많아지고 처벌이 가혹해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작은 범죄를 저지른 자도 큰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작은 잘못에도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

수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결혼식과 더불어 그의 장군들과 부하들의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다리우스 3세(Darius III)의 장녀 바르시네(Barsine)와 결혼하였으며,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에 따르면, 그는 오쿠스(Ochus)의 막내딸 파리사티스(Parysatis)와도 결혼하였다. 또한 그는 이미 박트리아 총독 옥시아르테스(Oxyartes)의 딸 록사나(Roxana)와 결혼한 상태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에게도 페르시아 및 메디아 귀족 여성들과 결혼하도록 장려하였다. 헤파이스티온(Hephaestion): 다리우스 3세의 또 다른 딸인 드리페티스(Drypetis)와 결혼. (알렉산드로스의 아내와 자매 관계였기 때문에, 두 가문의 자녀들이 사촌이 되도록 하기 위함) 크라테루스(Craterus): 다리우스 3세의 형제 옥시아르테스(Oxyartes)의 딸 아마스트리네(Amastrine)와 결혼. 페르디카스(Perdiccas): 메디아 총독 아트로파테스(Atropates)의 딸과 결혼.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와 에우메네스(Eumenes): 다리우스의 측근 아르타바조스(Artabazus)의 딸과 결혼.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르타카마(Artacama), 에우메네스는 아르토니스(Artonis)와 결혼) 네아르코스(Nearchus): 바르시네(Barsine)와 멘토르(Mentor)의 딸과 결혼. 셀레우코스(Seleucus): 박트리아의 귀족 스피타메네스(Spitamenes)의 딸과 결혼.알렉산드로스는 총 80명의 마케도니아 장군과 페르시아 및 메디아 귀족 여성들을 결혼시키며 동서 융합 정책을 강화하였다. 결혼식은 페르시아 전통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랑들은 줄지어 앉아 기다렸으며, 연회가 끝난 후, 각 신부들이 들어와 자신의 남편 옆에 앉았다. 신랑들은 신부의 오른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맨 먼저 결혼 의식을 시작하며 모범을 보였다. 이후 모든 결혼식이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합동 결혼식은 알렉산드로스가 부하들과 함께 공유한 가장 인기 있는 행사 중 하나로 평가되었으며, 이는 그가 부하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 남았다. 결혼식이 끝난 후, 각 신랑들은 신부를 데리고 떠났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예외 없이 모든 신랑들에게 지참금을 지급하였다. 또한, 그는 마케도니아 병사들 중에서 아시아 여성과 결혼한 자들의 명단을 등록하도록 명령하였으며, 그 수는 10,000명이 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에게도 결혼 선물을 지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