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노인과 꽃

노인이 꽃나무를 심으시면 무슨 보람을 위하심이오니까. 등이 곱으시고 숨이 차신데도 그래도 꽃을 가꾸시는 양을 뵈오니, 손수 공드리신 가지에 붉고 빛나는 꽃이 맺으리라고 생각하오니, 희고 희신 나룻이나 주름살이 도리어 꽃답도소이다.

나이 이순(耳順)을 넘어 오히려 여색(女色)을 기르는 이도 있거니 실로 누(陋)하기 그지없는 일이옵니다. 빛깔에 취할 수 있음은 빛이 어느 빛일는지 청춘에 맡길 것일는지도 모르겠으나 쇠년(衰年)에 오로지 꽃을 사랑하심을 뵈오니 거룩하시게도 정정하시옵니다.

봄비를 맞으시며 심으신 것이 언제 바람과 햇빛이 더워오면 고운 꽃봉오리가 촉(燭)불 혀듯 할 것을 보실 것이매 그만치 노래(老來)의 한 계절이 헛되이 지나지 않은 것이옵니다.

노인의 고담(枯淡)한 그늘에 어린 자손이 희희(戱戱)하며 꽃이 피고 나무와 벌이 날며 닝닝거린다는 것은 여년(餘年)과 해골을 장식하기에 이렇듯 화려한 일이 없을 듯하옵니다.

해마다 꽃은 한 꽃이로되 사람은 해마다 다르도다. 만일 노인 백세 후에 기거하시던 창호(窓戶)가 닫히고 뜰 앞에 손수 심으신 꽃이 난만할 때 우리는 거기서 슬퍼하겠나이다. 그 꽃을 어찌 즐길 수가 있으리까. 꽃과 주검을 실로 슬퍼할 자는 청춘이요 노년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분방히 끓는 정염이 식고 호화롭고도 홧홧한 부끄럼과 건질 수 없는 괴롬으로 수놓은 청춘의 웃옷을 벗은 뒤에 오는 청수(淸秀)하고 고고하고 유한하고 완강하기 학(鶴)과 같은 노년의 덕으로서 어찌 주검과 꽃을 슬퍼하겠습니까. 그러기에 꽃이 아름다움을 실로 볼 수 있기는 노경(老境)에서일까 합니다.

멀리멀리 나- 땅끝으로서 오기는 초뢰사(初瀨寺)의 백목단(白牧丹)이 그 중 일점(一點) 담홍빛을 보기 위하야.

의젓한 시인 포올 클로델은 모란 한 떨기 만나기 위하여 이렇듯 멀리 왔더라니, 제자 위에 붉은 한송이 꽃이 심성(心性)의 천진과 서로 의지하며 즐기기에는 바다를 몇 씩 건너온다느니보담 미옥(美玉)과 같이 연마된 춘추를 지니어야 할까 합니다.

실상 청춘은 꽃을 그다지 사랑할 배도 없을 것이며 다만 하늘의 별 물 속의 진주 마음속에 사람을 표정(表情)하기 위하여 꽃을 꺾고 꽂고 선사하고 찢고 하였을 뿐이 아니었습니까. 이도 또한 노년의 지혜와 법열을 위하여 청춘이 지나지 아니치 못할 연옥과 시련이기도 하였습니다.

오호(嗚呼) 노년과 꽃이 서로 비추고 밝은 그 어느날 나의 나룻도 눈과 같이 희어지이다 하노니 나머지 청춘에 다시 설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