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 요가

(라자요가에서 넘어옴)

CHAPTER I (제1장)
CONCENTRATION: ITS SPIRITUAL USES(요가:마음의 작용)
- 사마띠(samadhi) 집중(또는 결합) -
CHAPTER II (제2장)
CONCENTRATION: ITS PRACTICE(요가:숙련)
- 아사나(asana) 수행 -
CHAPTER III (제3장)
POWERS(능력의 시작점)
- 다라나(dharana) 동작(호흡)의 유지(the act(breath) of holding) -
CHAPTER IV (제4장)
INDEPENDENCE (연결점으로서의) 독립
- 카이발랴(kaivalya) 분해와 재조립(결합) - 독립(Stand Alone) 그리고 온전한 연결성(Network) -

PATANJALI'S YOGA APHORISMS CHAPTER I CONCENTRATION: SPIRITUAL USES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제1장 요가:마음의 작용

अथ योगानुशासनम् ॥१॥
atha yogānuśāsanam
1. Now concentration is explained.
[1.1] 이제 집중(yoga)[6][7][8][9][10]이 설명됩니다.[11][12]


योगश्चित्तवृत्तिनिरोधः ॥२॥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2. Yoga is restraining the mind-stuff (Chitta) from taking various forms (Vrittis).
[1.2] 요가(yoga)는 마음의 물질(Chitta치타)이 다양한 형태(Vrittis브리티스)를 취하는 것을 억제(차분히 진정하도록)합니다.[13][14]

A good deal of explanation is necessary here. We have to understand what Chitta is, and what the Vrittis are. I have eyes. Eyes do not see. Take away the brain centre which is in the head, the eyes will still be there, the retinae complete, as also the pictures of objects on them and yet the eyes will not see. So the eyes are only a secondary instrument, not the organ of vision. The organ of vision is in a nerve centre of the brain. The two eyes will not be sufficient. Sometimes a man is asleep with his eyes open. The light is there and the picture is there, but a third thing is necessary — the mind must be joined to the organ. The eye is the external instrument; we need also the brain centre and the agency of the mind. Carriages roll down a street, and you do not hear them. Why? Because your mind has not attached itself to the organ of hearing. First, there is the instrument, then there is the organ, and third, the mind attached to these two. The mind takes the impression farther in, and presents it to the determinative faculty — Buddhi — which reacts. Along with this reaction flashes the idea of egoism. Then this mixture of action and reaction is presented to the Purusha, the real Soul, who perceives an object in this mixture. The organs (Indriyas), together with the mind (Manas), the determinative faculty (Buddhi), and egoism (Ahamkāra), form the group called the Antahkarana (the internal instrument). They are but various processes in the mind-stuff, called Chitta. The waves of thought in the Chitta are called Vrittis (literally "whirlpool"). What is thought? Thought is a force, as is gravitation or repulsion. From the infinite storehouse of force in nature, the instrument called Chitta takes hold of some, absorbs it and sends it out as thought. Force is supplied to us through food, and out of that food the body obtains the power of motion etc. Others, the finer forces, it throws out in what we call thought. So we see that the mind is not intelligent; yet it appears to be intelligent. Why? Because the intelligent soul is behind it. You are the only sentient being; mind is only the instrument through which you catch the external world. Take this book; as a book it does not exist outside, what exists outside is unknown and unknowable. The unknowable furnishes the suggestion that gives a blow to the mind, and the mind gives out the reaction in the form of a book, in the same manner as when a stone is thrown into the water, the water is thrown against it in the form of waves. The real universe is the occasion of the reaction of the mind. A book form, or an elephant form, or a man form, is not outside; all that we know is our mental reaction from the outer suggestion. "Matter is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sensations," said John Stuart Mill. It is only the suggestion that is outside. Take an oyster for example. You know how pearls are made. A parasite gets inside the shell and causes irritation, and the oyster throws a sort of enamelling round it, and this makes the pearl. The universe of experience is our own enamel, so to say, and the real universe is the parasite serving as nucleus. The ordinary man will never understand it, because when he tries to do so, he throws out an enamel, and sees only his own enamel. Now we understand what is meant by these Vrittis. The real man is behind the mind; the mind is the instrument in his hands; it is his intelligence that is percolating through the mind. It is only when you stand behind the mind that it becomes intelligent. When man gives it up, it falls to pieces and is nothing. Thus you understand what is meant by Chitta. It is the mind-stuff, and Vrittis are the waves and ripples rising in it when external causes impinge on it. These Vrittis are our universe.
여기에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치타Chitta[15]가 무엇인지, 브리티(스)Vritti(s)[16]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나에겐 눈이 있습니다.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머리에 있는 뇌 중추를 제거하면 눈은 그대로 있고 망막도 완전하며 그 위에 있는 물체의 그림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시각 기관(의 핵심)이 아니라 보조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시각 기관은 뇌의 신경 중심에 있습니다. 두 눈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은 눈을 뜨고 잠 들어 있습니다. 빛도 있고 그림도 있(겠)지만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은 마음이 기관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외부 도구입니다. 우리에게는 뇌 센터와 마음의 주체도 필요합니다. 마차가 거리를 굴러가는데도 당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왜? 당신의 마음이 청각 기관에 붙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외부세계와 연결되는)도구(감각 기관)가 있고, 그 다음이 (뇌로 가는 신경)기관이 있고, 셋째, 이 둘에 붙어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그 인상을 더 멀리 받아들여 반응하는 결정적 능력인 붓디(Buddhi)에게 제시합니다. 이 반응과 함께 이기주의라는 생각이 번쩍입니다. 그러면 이 작용과 반작용의 혼합이 진정한 영혼인 푸루샤(Purusha)[17]에게 제시되고, 푸루샤는 이 혼합물 속에서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기관(Indriyas)은 마음(Manas), (결정) 능력(Buddhi), 이기심(Ahamkāra)과 함께 안타흐카라나Antahkarana(내부 도구)라는 그룹을 형성합니다. 그것들은 치타(Chitta)라고 불리는 정신 물질의 다양한 과정일 뿐입니다.치타Chitta의 생각의 파문(波紋)을 브리티(스)Vrittis(문자 그대로 '소용돌이'[18])라고 합니다. 생각이란 무엇입니까? 중력이나 반발력과 마찬가지로 생각도 힘입니다. 자연의 무한한 힘의 창고에서 치타라는 도구가 일부를 붙잡고 흡수하여 생각으로 내보냅니다. 힘은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되고, 그 음식에서 신체는 운동의 힘 등을 얻습니다. 다른 것, 즉 더 미세한 힘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지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능적인 것 같습니다. 왜? 그 뒤에는 지적인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일한 지각(이 보다 무한히 확장될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은 외부 세계를 포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여기)이 책을 가져가세요(라는 말은) 책으로서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알지 못하며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에 충격을 주는 제안을 제공하고, 마음은 그 반응을 책의 형태로 내보냅니다. 물에 돌을 던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은 파도(물결)의 형태로 그것(돌)에 던져져집니다. 실제 우주는 마음이 반응하는 기회입니다. 책의 형상, 코끼리의 형상, 사람의 형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외부 제안에 대한 정신적 반응뿐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물질은 감각의 영구적인 가능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밖에 있는 것은 단지 제안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굴을 생각해 보세요.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시나요? 기생충이 껍질 안으로 들어가서 자극을 일으키고, 굴은 껍질 주위에 일종의 에나멜을 던져서 진주를 만듭니다. 경험의 우주는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에나멜이고, 실제 우주는 핵 역할을 하는 기생충인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에나멜을 버리고 자신의 에나멜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브리티(들)Vritti(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합니다. 진짜 사람(을 사람답게하는것)은 마음 뒤에 있습니다. 마음은 그의 손에 있는 도구입니다. 마음을 통해 스며드는 것은 그의 지능입니다. 마음이 지적으로 변하는 것은 (지능이)마음 뒤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면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은 치타Chitta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재료이고 브리티스Vrittis는 외부 원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잔물결입니다. 이 브리티스Vrittis는 우리의 우주입니다.

The bottom of a lake we cannot see, because its surface is covered with ripples. It is only possible for us to catch a glimpse of the bottom, when the ripples have subsided, and the water is calm. If the water is muddy or is agitated all the time, the bottom will not be seen. If it is clear, and there are no waves, we shall see the bottom. The bottom of the lake is our own true Self; the lake is the Chitta and the waves the Vrittis. Again, the mind is in three states, one of which is darkness, called Tamas, found in brutes and idiots; it only acts to injure. No other idea comes into that state of mind. Then there is the active state of mind, Rajas, whose chief motives are power and enjoyment. "I will be powerful and rule others." Then there is the state called Sattva, serenity, calmness, in which the waves cease, and the water of the mind-lake becomes clear. It is not inactive, but rather intensely active. It is the greatest manifestation of power to be calm. It is easy to be active. Let the reins go, and the horses will run away with you. Anyone can do that, but he who can stop the plunging horses is the strong man. Which requires the greater strength, letting go or restraining? The calm man is not the man who is dull. You must not mistake Sattva for dullness or laziness. The calm man is the one who has control over the mind waves. Activity is the manifestation of inferior strength, calmness, of the superior.
호수 바닥은 표면이 잔물결로 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잔물결이 가라앉고 물이 잔잔할 때만 바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이 탁하거나 계속 흔들리면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맑고 파도가 없으면 바닥이 보입니다. 호수 바닥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호수는 치타Chitta이고 파도는 브리티(스)Vritti(s)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세 가지 상태에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짐승과 바보에게서 발견되는 타마스(Tamas)라고 불리는 어둠입니다. 그것은 단지 상처를 입히는 역할만 합니다. 그런 마음 상태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힘과 즐거움을 주된 동기로 하는 활동적인 마음 상태인 라자스(Rajas)가 있습니다. "나는 강력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트바(Sattva), 고요함, 평온함이라는 상태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는 파도가 그치고 마음 호수의 물이 맑아집니다. 비활성이 아니라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합니다.(따라서) 침착함은 가장 큰 힘의 표현입니다. (안정된)활동이 (몸은)쉽습니다. 고삐를 놓으면 말들이 당신을 이끌고 (아무렇게나)도망갈 것입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멋대로 질주하는 말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놓아주는 것과 제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힘을 필요로 합니까? 차분한 사람은 둔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트바를 둔함이나 게으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차분한 사람은 마음의 파동(파도)을 통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활동은 열등한 힘의 (절제된)구현이며, 평온함이나 우월함의 표현입니다.

The Chitta is always trying to get back to its natural pure state, but the organs draw it out. To restrain it, to check this outward tendency, and to start it on the return journey to the essence of intelligence is the first step in Yoga, because only in this way can the Chitta get into its proper course.
치타는 항상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기관은 그것을 (반대로)끌어냅니다. 그것을 억제하고, 이러한 외적 경향을 확인하고, 지성의 본질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요가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만이 치타가 올바른 경로(를 찾아 제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Although the Chitta is in every animal,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it is only in the human form that we find it as the intellect. Until the mind-stuff can take the form of intellect it is not possible for it to return through all these steps, and liberate the soul. Immediate salvation is impossible for the cow or the dog, although they have mind, because their Chitta cannot as yet take that form which we call intellect.
치타는 가장 낮은 것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에게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장된 그리고 동시에 매우 축약된)지성으로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형태에서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가능합니다. 마음의 물질이 지성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모든 단계를 거쳐 돌아와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소나 개는 마음이 있더라도 (이러한 이유에서)즉각적인 구원은 매우 어려울것입니다. 치타는 아직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The Chitta manifests itself in the following forms — scattering, darkening, gathering, one-pointed, and concentrated. The scattering form is activity. Its tendency is to manifest in the form of pleasure or of pain. The darkening form is dullness which tends to injury. The commentator says, the third form is natural to the Devas, the angels, and the first and second to the demons. The gathering form is when it struggles to centre itself. The one-pointed form is when it tries to concentrate, and the concentrated form is what brings us to Samādhi.
치타는 흩어짐, 어두워짐, 모임, 합일 , 집중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산란(흩어짐) 형태는 활동입니다. 그 경향은 즐거움이나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는 형태는 상처를 입기 쉬운 둔감함입니다. 주석가(들)[19]는 세 번째 형태는 데바(deva)들과 천사(angel)들에게 자연스럽고 첫 번째와 두 번째 형태는 악마(demon)들에게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모이는 형태는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형태입니다. 일점(합일)형은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고, 집중(단계)은 우리를 사마띠(Samādhi)로 이끄는 것입니다.


तदा द्रष्टुः स्वरूपेऽवस्थानम् ॥३॥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3. At that time (After all waves have finished. This is nothing to take with concentration)the seer (Purusha) rests in his own (unmodified) state.
[1.3]그 때(모든 파동이 잦아들어 멈춘후. 이것은 집중과 관련이 없습니다.) 보는자seer(푸루샤purusha)[20]는 자신의 (변형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As soon as the waves have stopped, and the lake has become quiet, we see its bottom. So with the mind; when it is calm, we see what our own nature is; we do not mix ourselves but remain our own selves.
파도(파동)가 멈추고 호수가 조용해지면 바닥이 보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온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섞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유지합니다.

वृत्तिसारूप्यमितरत्र ॥४॥
vṛttisārūpyam itaratra
4. At other times (other than that of concentration) the seer is identified with the modifications.
[1.4] 다른 때에는(집중하는 경우가 아닌) 보는 자(seer)가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으로 나타납니다.[21]

For instance, someone blames me; this produces a modification, Vritti, in my mind, and I identify myself with it, and the result is misery.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 속에 변화를 낳고, 나는 그것과 동일시되며, 그 결과는 비참함입니다.

वृत्तयः पंचतय्यः क्लिष्टा अक्लिष्टाः ॥५॥
vṛttayaḥ pañcatay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
5. There are five classes of modifications, (some) painful and (others) not painful.
[1.5] 변형(vrittis브리티스)된 것에는 5가지 종류가 있으며, 일부는 고통스럽고 일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प्रमाण-विपर्यय-विकल्प-निद्रा-स्मृतयः ॥६॥
pramāṇaviparyayavikalpanidrāsmṛtayaḥ
6. (These are) right knowledge, indiscrimination, verbal delusion, sleep, and memory.
[1.6] (이것은) 올바른 지식, 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 그리고 기억입니다.

प्रत्यक्षानुमानागमाः प्रमाणानि ॥७॥
pratyakṣānumānāgamāḥ pramāṇāni
7. Direct perception, inference, and competent evidence are proofs.
[1.7] 직접적인 인식, 추론, 정당한 증거가 증명된 것(올바른 지식)들입니다.[22]

When two of our perceptions do not contradict each other, we call it proof. I hear something, and if it contradicts something already perceived, I begin to fight it out, and do not believe it. There are also three kinds of proof. Pratyaksha, direct perception; whatever we see and feel, is proof, if there has been nothing to delude the senses. I see the world; that is sufficient proof that it exists. Secondly, Anumāna, inference; you see a sign, and from the sign you come to the thing signified. Thirdly, Āptavākya, the direct evidence of the Yogis, of those who have seen the truth. We are all of us struggling towards knowledge. But you and I have to struggle hard, and come to knowledge through a long tedious process of reasoning, but the Yogi, the pure one, has gone beyond all this. Before his mind,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are alike, one book for him to read; he does not require to go through the tedious processes for knowledge we have to; his words are proof, because he sees knowledge in himself. These, for instance, are the authors of the sacred scriptures; therefore the scriptures are proof. If any such persons are living now their words will be proof. Other philosophers go into long discussions about Aptavakya and they say, "What is the proof of their words?" The proof is their direct perception. Because whatever I see is proof, and whatever you see is proof, if it does not contradict any past knowledge. There is knowledge beyond the senses, and whenever it does not contradict reason and past human experience, that knowledge is proof. Any madman may come into this room and say he sees angels around him; that would not be proof. In the first place, it must be true knowledge, and secondly, it must not contradict past knowledge, and thirdly, it must depend upon the character of the man who gives it out. I hear it said that the character of the man is not of so much importance as what he may say; we must first hear what he says. This may be true in other things. A man may be wicked, and yet make an astronomical discovery, but in religion it is different, because no impure man will ever have the power to reach the truths of religion. Therefore we have first of all to see that the man who declares himself to be an Āpta is a perfectly unselfish and holy person; secondly, that he has reached beyond the senses; and thirdly, that what he says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knowledge of humanity. Any new discovery of truth does not contradict the past truth, but fits into it. And fourthly, that truth must have a possibility of verification. If a man says, "I have seen a vision," and tells me that I have no right to see it, I believe him not. Everyone must have the power to see it for himself. No one who sells his knowledge is an Apta. All these conditions must be fulfilled; you must first see that the man is pure, and that he has no selfish motive; that he has no thirst for gain or fame. Secondly, he must show that he is superconscious. He must give us something that we cannot get from our senses, and which is for the benefit of the world. Thirdly, we must see that it does not contradict other truths; if it contradicts other scientific truths reject it at once. Fourthly, the man should never be singular; he should only represent what all men can attain. The three sorts of proof are, then, direct sense-perception, inference, and the words of an Apta. I cannot translate this word into English. It is not the word "inspired", because inspiration is believed to come from outside, while this knowledge comes from the man himself. The literal meaning is "attained."
우리의 인식 중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증명(검증)된것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어떤 것을 듣고 그것이 이미 인식한 것과 모순되면 그것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고 (어느것이 옳은지 알때까지)그것(들)을 (합리적 의심에서)믿지 않습니다. 증명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프라티악샤Pratyaksha(직접적인 인식),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든 감각을 현혹시키는 것이 없었다면 증거입니다. 나는 세상을 봅니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둘째, 아누마나(Anumāna,추론), 당신은 기호를 보고, 그 기호로부터 (계산해)상징된 사물(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진리를 본 자들, 요기들의 직접적인 증거인 아프타바키아Āptavākya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길고 지루한 추론 과정을 통해 지식에 도달해야 하지만, (오랜 세대를 걸친 경험의 시행착오로부터 축적된 시스템에 도달한)순수한 자인 요기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의 마음 앞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똑같기 전에, 그가 읽어야 할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식을 얻기 위해 지루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은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또 다음세대로 이어져온 그렇게 진화된)자신에게서 지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신성한 경전의 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 살고 있다면 그들의 말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다른 철학자들은 아프타바키아Aptavakya에 관해 긴 토론을 하면서 "그들의 말의 증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여러세대에서 검증된)직접적인 인식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이든 증거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과거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을 넘어서는 지식이 있으며, 그것이 이성과 과거 인간 경험과 모순되지 않을 때마다 그 지식이 증거가 됩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라도 이 방에 와서 자기 주위에 천사들이 있는 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첫째, 그것은 (검증된)진실한 지식이어야 하고, 둘째, 과거의 (검증된)지식과 모순되어서는 안 되며, 셋째,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성품(검증된 가치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성격이 그가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악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중요한)발견을 할 수 있지만, (철학)종교에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불순한 사람도 (생명에 반하지 않는)종교(철학)의 진리에 도달할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프타(apta)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완전히 비이기적이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감각을 넘어서 도달했습니다. 셋째, 그가 말하는 것은 인류의 과거 지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진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과거의 진실과 모순되지 않고 그 진실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 진실은 (재)검증의 (구현)가능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가 나에게는 그것을 볼 권리가 없다고 말하면 나는 그를 믿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사사로이)파는 사람은 아프타Apta가 아닙니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 사람이 순결하고 이기적인 동기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이득이나 명예에 목말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초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감각으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유익을 위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그것이 다른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다른 과학적 진실과 모순된다면 즉시 그것을 거부하십시요. 넷째, 그(분)는 결코 특이(특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만을 대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종류의 증명은 직접적인 감각-지각, 추론, 아프타(Apta)의 말(word)들입니다. 나는 이 단어를 영어로 (완전히)번역할 수 없습니다. 영감은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지식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영감받았다"라는 단어는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달성하다"일 것입니다.


विपर्ययो मिथ्याज्ञानमतद्रूपप्रतिष्ठम् ॥८॥
viparyayo mithyājñānam atadrūpapratiṣṭham
8. Indiscrimination is false knowledge not established in real nature.
[1.8] 무분별함은 실제 자연에서 확립(검증)되지 않은 거짓 지식입니다.

The next class of Vrittis that arises is mistaking one thing for another, as a piece of mother-of-pearl is taken for a piece of silver.
발생하는 브리티스의 다음 종류는 진주 한 조각이 은 한 조각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것(언어적 망상)입니다.

शब्दज्ञानानुपाती वस्तुशून्यो विकल्पः ॥९॥
śabdajñānānupātī vastuśūnyo vikalpaḥ
9. Verbal delusion follows from words having no (corresponding) reality.
[1.9] 언어적 망상은 (해당하는) 현실이 없는(사실적 검증이 결여된) 말에서 비롯됩니다.

There is another class of Vrittis called Vikalpa. A word is uttered, and we do not wait to consider its meaning; we jump to a conclusion immediately. It is the sign of weakness of the Chitta. Now you can understand the theory of restraint. The weaker the man, the less he has of restraint. Examine yourselves always by that test. When you are going to be angry or miserable, reason it out how it is that some news that has come to you is throwing your mind into Vrittis.
비칼파Vikalpa라고 불리는 또 다른 종류의 브리티스Vrittis가 있습니다.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고려하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즉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치타의 약점의 표시입니다. 이제 구속 이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약할수록 자제력이 약해집니다. 항상 그 시험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화를 내거나 비참하게 될 때, 당신에게 온 어떤 소식이 당신의 마음을 브리티스에 던지고 있다는 것을 추론하십시오.

अभाव-प्रत्ययालम्बना-वृत्तिर्निद्रा ॥१०॥
abhāvapratyayālambanā vṛttir nidrā
10. Sleep is a Vritti which embraces the feeling of voidness.
[1.10] 잠은 공허함을 포용하는 브리티(Vritti)입니다.

The next class of Vrittis is called sleep and dream. When we awake, we know that we have been sleeping; we can only have memory of perception. That which we do not perceive we never can have any memory of. Every reaction is a wave in the lake. Now, if, during sleep, the mind had no waves, it would have no perceptions, positive or negative, and, therefore, we would not remember them. The very reason of our remembering sleep is that during sleep there was a certain class of waves in the mind. Memory is another class of Vrittis which is called Smriti.
브리티스Vrittis의 다음 클래스는 수면과 꿈이라고 합니다. 깨어날 때 우리는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각에 대한 기억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기억할 수 없습니다. 모든 반응은 호수의 파도입니다. 자, 잠자는 동안 마음에 파동이 없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인식도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기억하는 바로 그 이유는 잠을 자는 동안 마음 속에 특정한 종류의 파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스므리티Smriti라고 불리는 브리티스Vrittis의 또 다른 종류입니다.

अनुभूतविषयासम्प्रमोषः स्मृतिः ॥११॥
anubhūtaviṣayāsaṃpramoṣaḥ smṛtiḥ
11. Memory is when the (Vrittis of) perceived subjects do not slip away (and through impressions come back to consciousness).
[1.11] 기억은 지각된 대상이 빠져나가지 않은 것(그리고 인상을 통해 의식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Memory can come from direct perception, false knowledge, verbal delusion, and sleep. For instance, you hear a word. That word is like a stone thrown into the lake of the Chitta; it causes a ripple, and that ripple rouses a series of ripples; this is memory. So in sleep. When the peculiar kind of ripple called sleep throws the Chitta into a ripple of memory, it is called a dream. Dream is another form of the ripple which in the waking state is called memory.
기억은 직접적인 지각, 잘못된 지식(무분별함), 언어적 망상, 잠으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단어를 듣습니다. 그 말은 치타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그것은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은 (계속해서)일련의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기억입니다. 그래서 잠에서, 잠이라는 기이한 파문이 치타를 기억의 파문 속으로 몰아넣을 때, 그것을 꿈이라 부릅니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라고 불리는 파문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अभ्यासवैराग्याभ्यां तन्निरोधः ॥१२॥
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
12. Their control is by practice and non-attachment.
[1.12] 그들의 통제는 실천(practice)에 의한 것이며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23]

The mind, to have non-attachment, must be clear, good, and rational. Why should we practise? Because each action is like the pulsations quivering over the surface of the lake. The vibration dies out, and what is left? The Samskāras, the impressions. When a large number of these impressions are left on the mind, they coalesce and become a habit. It is said, "Habit is second nature", it is first nature also, and the whole nature of man; everything that we are is the result of habit. That gives us consolation, because, if it is only habit, we can make and unmake it at any time. The Samskaras are left by these vibrations passing out of our mind, each one of them leaving its result. Our character is the sum-total of these marks, and according as some particular wave prevails one takes that tone. If good prevails, one becomes good; if wickedness, one becomes wicked; if joyfulness, one becomes happy. The only remedy for bad habits is counter habits; all the bad habits that have left their impressions are to be controlled by good habits. Go on doing good, thinking holy thoughts continuously; that is the only way to suppress base impressions. Never say any man is hopeless, because he only represents a character, a bundle of habits, which can be checked by new and better ones. Character is repeated habits, and repeated habits alone can reform character.
무집착(non-attachment)을 가지려면 마음이 깨끗하고 선하며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연습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각각의 행동은 호수 표면에서 떨리는 맥동(脈動)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동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나요? 삼스카라saṃskāra(인상)[24], 이러한 인상(印象)이 마음에 많이 남으면 그것들은 합쳐져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제1의 천성이자 인간의 본성 전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습관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만들고 취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스카라들(samskaras)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는 이러한 진동에 의해 남겨지며, 각각의 진동은 그 결과를 남깁니다. 우리의 성격은 이러한 표시의 총합이며, 어떤 특정한 물결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어조를 취합니다. 좋은 것이 승리하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악하면 사악해집니다. 기쁘면 행복해집니다. 나쁜 습관에 대한 유일한 치유방법은 반대 습관입니다. 그들의 인상에 남아 있는 모든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고, 끊임없이 거룩한 생각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기본 인상을 억제(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절망적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결과에서 판단되어서는 않되는 그리고 미래의 결과를 빼앗겨서는 않되는 현재의)그는 새롭고 더 나은 습관으로 점검할 수 있는 성격, 즉 습관 묶음을 대표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품성은 반복되는 습관이고, (따라서 당연히)반복되는 습관만으로도 품성을 개량(改良)할 수 있습니다.


तत्र स्थितौ यत्नोऽभ्यासः ॥१३॥
tatra sthitau yatno 'bhyāsaḥ
13. Continuous struggle to keep them (the Vrittis) perfectly restrained is practice.
[1.13] 그들(브리티스)을 완벽하게 제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실천(뿐)입니다.

What is practice? The attempt to restrain the mind in Chitta form, to prevent its going out into waves.
연습(실천,practice)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파도(가 이는 물속 깊이)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치타 형태로 억제하려는 시도입니다.

स तु दीर्घकालनैरन्तर्यसत्कारासेवितो दृढभूमिः ॥१४॥
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āsevito dṛḍhabhūmiḥ
14. It becomes firmly grounded by long constant efforts with great love (for the end to be attained).[25]
[1.14]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큰 사랑(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확고히 자리잡는것 입니다.

Restraint does not come in one day, but by long continued practice.
절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연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दृष्टानुश्रविकविषयवितृष्णस्य वशीकारसंज्ञा वैराग्यम् ॥१५॥
dṛṣṭānuśravikaviṣayavitṛṣṇasya vaśīkārasaṃjñā vairāgyam
15. That effect which comes to those who have given up their thirst after objects, either seen or heard, and which wills to control the objects, is non-attachment.
[1.15] 보거나 들은 대상에 대한 갈망(욕구)을 버리고 그 대상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무집착(non-attachment)입니다.

The two motive powers of our actions are (1) what we see ourselves, (2) the experience of others. These two forces throw the mind, the lake, into various waves. Renunciation is the power of battling against these forces and holding the mind in check. Their renunciation is what we want. I am passing through a street, and a man comes and takes away my watch. That is my own experience. I see it myself, and it immediately throws my Chitta into a wave, taking the form of anger. Allow not that to come. If you cannot prevent that, you are nothing; if you can, you have Vairāgya. Again, the experience of the worldly-minded teaches us that sense-enjoyments are the highest ideal. These are tremendous temptations. To deny them, and not allow the mind to come to a wave form with regard to them, is renunciation; to control the twofold motive powers arising from my own experience and from the experience of others, and thus prevent the Chitta from being governed by them, is Vairāgya. These should be controlled by me, and not I by them. This sort of mental strength is called renunciation. Vairāgya is the only way to freedom.
우리 행동의 두 가지 원동력은 (1)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2)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이 두 힘은 마음, 즉 호수를 다양한 파도로 몰아넣습니다. 거부(renunciation)는 이러한 세력에 맞서 싸우고 마음을 억제하는 힘입니다. 그들의 거부(renunciation)는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내 시계를 빼앗아갔습니다. 그것은 내 경험입니다. 나는 그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은 즉시 내 치타를 분노의 형태로 파도에 던져넣습니다.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막을 수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바이라기야Vairāgya[26]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은 감각적 즐거움이 최고의 이상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은 엄청난 유혹입니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마음이 그것들에 관한 파동의 형태로 나아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 거부(renunciation)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이중 원동력을 통제하여 치타가 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바이라기야(vairāgya)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이들을 스스로) 통제해야지, 내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정신력을 거부(renunciation)라고 합니다. 바이라기야(vairāgya)는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तत्परं पुरुषख्यातेर्गुणवैतृष्ण्यम् ॥१६॥
tat paraṃ puruṣakhyāter guṇavaitṛṣṇyam
16. That is extreme non-attachment which gives up even the qualities, and comes from the knowledge of (the real nature of) the Purusha.
[1.16] 그것은 자질마저도 포기하는 극단적인 무집착이며 푸루샤(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지식(의지)에서 비롯됩니다.

It is the highest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Vairagya when it takes away even our attraction towards the qualities. We have first to understand what the Purusha, the Self, is and what the qualities are. According to Yoga philosophy, the whole of nature consists of three qualities or forces; one is called Tamas, another Rajas, and the third Sattva. These three qualities manifest themselves in the physical world as darkness or inactivity, attraction or repulsion, and equilibrium of the two. Everything that is in nature, all manifestations, are combinations and recombinations of these three forces. Nature has been divided into various categories by the Sānkhyas; the Self of man is beyond all these, beyond nature. It is effulgent, pure, and perfect. Whatever of intelligence we see in nature is but the reflection of this Self upon nature. Nature itself is insentient. You must remember that the word nature also includes the mind; mind is in nature; thought is in nature; from thought, down to the grossest form of matter, everything is in nature, the manifestation of nature. This nature has covered the Self of man, and when nature takes away the covering, the self appears in Its own glory. The non-attachment, as described in aphorism 15 (as being control of objects or nature) is the greatest help towards manifesting the Self. The next aphorism defines Samadhi, perfect concentration, which is the goal of the Yogi.
그것은 자질에 대한 우리의 매력조차 빼앗아 갈 때 바이라기야(vairāgya)의 힘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푸루샤(purusha), 즉 자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특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요가 철학(yoga philosophy)에 따르면 자연 전체는 세 가지 특성 또는 힘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타마(스)Tama(s)[27], 다른 하나는 라자(스)Raja(s)[28], 세 번째는 사트바Sattva[29]라고 불립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물리적 세계에서 어둠 또는 비활성, 감정 또는 정서, 그리고 이 둘의 균형으로 나타납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 모든 발현은 이 세 가지 힘의 결합과 재결합입니다. 자연은 삼키아(sāṃkhya또는 상키야sāṇkhya)에 의해 다양한 범주로 나누어졌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 모든 것, 자연 너머에 있습니다. 그것은 빛나고 순수하며 완벽합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지능은 무엇이든 자연에 대한 이 자아의 반영일 뿐입니다. 자연 자체는 무감각합니다. 자연이라는 단어에는 마음도 포함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은 자연 속에 있다. 생각은 자연 속에 있습니다. 생각에서부터 물질의 가장 조악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있고 자연의 현현입니다. 이 본성이 인간의 자아를 덮고 있으며, 본성이 그 덮개를 벗기면 자아는 그 자체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1.15]에 설명된 무집착(물체나 자연을 통제하는 것)은 자아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1.17]은 수행자의 목표인 완벽한 집중인 사마띠(Samadhi 또는 삼매三昧)를 정의합니다.

वितर्कविचारानन्दास्मितानुगमात् सम्प्रज्ञातः ॥१७॥
vitarkavicārānandāsmitārūpānugamāt saṃprajñātaḥ
17. The concentration called right knowledge is that which is followed by reasoning, discrimination, bliss, unqualified egoism.
[1.17] 올바른 지식이라고 불리는 집중에는 추론, 분별, 행복, 무자비한 이기주의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Samadhi is divided into two varieties. One is called the Samprajnāta, and the other the Asamprajnāta. In the Samprajnata Samadhi come all the powers of controlling nature. It is of four varieties. The first variety is called the Savitarka, when the mind meditates upon an object again and again, by isolating it from other objects. There are two sorts of objects for meditation in the twenty-five categories of the Sankhyas, (1) the twenty-four insentient categories of nature, and (2) the one sentient Purusha. This part of Yoga is based entirely on Sankhya philosophy, about which I have already told you. As you will remember, egoism and will and mind have a common basis, the Chitta or the mind-stuff, out of which they are all manufactured. The mind-stuff takes in the forces of nature, and projects them as thought. There must be something, again, where both force and matter are one. This is called Avyakta, the unmanifested state of nature before creation, and to which, after the end of a cycle, the whole of nature returns, to come out again after another period. Beyond that is the Purusha, the essence of intelligence. Knowledge is power, and as soon as we begin to know a thing, we get power over it; so also when the mind begins to meditate on the different elements, it gains power over them. That sort of meditation where the external gross elements are the objects is called Savitarka. Vitarka means question; Savitarka, with question, questioning the elements, as it were, that they may give their truths and their powers to the man who meditates upon them. There is no liberation in getting powers. It is a worldly search after enjoyments, and there is no enjoyment in this life; all search for enjoyment is vain; this is the old, old lesson which man finds so hard to learn. When he does learn it, he gets out of the universe and becomes free. The possession of what are called occult powers is only intensifying the world, and in the end, intensifying suffering. Though as a scientist Patanjali is bound to point out the possibilities of this science, he never misses an opportunity to warn us against these powers.
사마띠(Samadhi)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삼프라갸타samprajñāta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아삼프라갸타asamprajñāta라고 합니다. 삼프라갸타사마띠(samprajnata Samadhi)에서는 자연을 통제하는 모든 힘이 나옵니다. 4가지 종류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하는데, 마음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리하여 계속해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상크야(Sankhya)[30]의 25가지 범주, 즉 (1) 자연의 24가지 무정범주와 (2) 하나의 감각이 있는 푸루샤에는 명상을 위한 두 종류의 대상이 있습니다. 요가의 이 부분은 내가 이미 말씀드린 상키야 또는 상캬(Sankhya) 철학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이기주의와 의지와 마음은 치타(Chitta), 즉 마음의 재료라는 공통 기반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마음의 재료는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으로 투사합니다. 힘과 물질이 모두 하나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아비약타(Avyakta)라고 부르는데, 창조 이전의 자연의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며, 순환이 끝나면 자연 전체가 되돌아오고 또 다른 기간 후에 다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그 너머에는 지능의 본질인 푸루샤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다양한 요소에 대해 명상하기 시작하면 그 요소에 대한 힘을 얻게 됩니다. 외부의 총체적 요소가 대상이 되는 그런 종류의 명상을 사비타르카(Savitarka)라고 합니다. 비타르카Vitarka는 질문을 의미합니다. 사비타르카Savitarka는 요소에 대해 명상하는 사람에게 진리와 힘을 줄 수 있도록 요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권력을 얻는 데에는 해방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생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배우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는 오래되고 오래된 교훈입니다. 그가 이것을 배우면, 그는 우주에서 나와 자유로워집니다. 소위 신비로운 힘을 소유하는 것은 세상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며, 결국 고통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과학자로서 파탄잘리는 이 과학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Again, in the very same meditation, when one struggles to take the elements out of time and space, and think of them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tarka, without question. When the meditation goes a step higher, and takes the Tanmātras as its object, and thinks of them as in time and space, it is called Savichāra, with discrimination; and when in the same meditation one eliminates time and space, and thinks of the fine elements as they are, it is called Nirvichāra, without discrimination. The next step is when the elements are given up, both gross and fine, and the object of meditation is the interior organ, the thinking organ. When the thinking organ is thought of as bereft of the qualities of activity and dullness, it is then called Sānanda, the blissful Samadhi. When the mind itself is the object of meditation, when meditation becomes very ripe and concentrated, when all ideas of the gross and fine materials are given up, when the Sattva state only of the Ego remains, but differentiated from all other objects, it is called Sāsmitā Samadhi. The man who has attained to this has attained to what is called in the Vedas "bereft of body". He can think of himself as without his gross body; but he will have to think of himself as with a fine body. Those that in this state get merged in nature without attaining the goal are called Prakritilayas, but those who do not stop even there reach the goal, which is freedom.
다시 말하지만, 동일한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에서 요소들을 꺼내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려고 애쓸 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니르비타르카(Nirvitarka)라고 불립니다. 명상이 한 단계 더 올라가서 탄마뜨라를 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을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 그것을 구별하여 사비차라(Savichār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같은 명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고 미세한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때, 그것을 차별 없이 무반성(니르비카라 nirvicāra निर्विचार)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단계는 거친 요소와 미세한 요소를 모두 포기하고 명상의 대상이 내부 기관, 즉 사고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 기관이 활동성 및 둔함의 특성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되면, 이를 사난다(Sānanda), 즉 행복한 사마띠(Samadhi)라고 부릅니다. 마음 자체가 명상의 대상이 될 때, 명상이 매우 성숙하고 집중될 때, 거칠고 가는 물질에 대한 모든 관념이 사라질 때, 자아의 사트바 상태만 남고 다른 모든 대상과 구별될 때, 사스미타 사마띠(Sāsmitā Samadhi)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달성한 사람은 베다에서 '몸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훌륭한 몸(body)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자연에 융합되는 사람들을 프라크리티라야(Prakritilayas)라고 부르지만, 거기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목표인 자유에 도달합니다.


विरामप्रत्ययाभ्यासपूर्वः संस्कारशेषोऽन्यः ॥१८॥
virāmapratyayābhyāsapūrvaḥ saṃskāraśeṣo 'nyaḥ
18. There is another Samadhi which is attained by the constant practice of cessation of all mental activity, in which the Chitta retains only the unmanifested impressions.
[1.18] 모든 정신적 활동을 끊임없이 중단함으로써 달성되는 또 다른 사마띠가 있는데, 여기서 치타(Chitta)는 드러나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인상만을 유지(해야)합니다.

This is the perfect superconscious Asamprajnata Samadhi, the state which gives us freedom. The first state does not give us freedom, does not liberate the soul. A man may attain to all powers, and yet fall again. There is no safeguard until the soul goes beyond nature. It is very difficult to do so, although the method seems easy. The method is to meditate on the mind itself, and whenever thought comes, to strike it down, allowing no thought to come into the mind, thus making it an entire vacuum. When we can really do this, that very moment we shall attain liberation. When persons without training and preparation try to make their minds vacant, they are likely to succeed only in covering themselves with Tamas, the material of ignorance, which make the mind dull and stupid, and leads them to think that they are making a vacuum of the mind. To be able to really do that is to manifest the greatest strength, the highest control. When this state, Asamprajnata, superconsciousness, is reached,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What is meant by that? In a concentration where there is consciousness, where the mind succeeds only in quelling the waves in the Chitta and holding them down, the waves remain in the form of tendencies. These tendencies (or seeds) become waves again, when the time comes. But when you have destroyed all these tendencies, almost destroyed the mind, then the Samadhi becomes seedless; there are no more seeds in the mind out of which to manufacture again and again this plant of life, this ceaseless round of birth and death.
이것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초의식(superconscious)인 아삼프라갸타 사마띠(asamprajnata Samadhi)입니다. 첫 번째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으며, 영혼을 해방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권능을 얻었지만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연을 넘어설 때까지는 안전 장치가 없습니다. 방법은 쉬운 것 같아도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방법은 마음 자체에 대해 명상하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정신을)차려서 아무 생각도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마음을 완전한 공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훈련과 준비가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마음을 무디고 어리석게 만들고 마음을 비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지의 물질인 타마스로 자신을 덮는 데 성공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 가장 높은 통제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상태, 즉 초의식인 아삼프라갸타(Asamprajnata)에 도달하면 (더이상)사마띠Samadhi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의식이 있는 집중, 즉 마음이 치타의 파동을 진압하고 억제하는 데에만 성공하는 집중에서는 파동이 경향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또는 씨앗)은 때가 되면 다시 파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향을 파괴하고 (이러한)마음을 거의 종식하면 사마띠에는 씨앗이 없게 됩니다. 마음 속에는 이 생명의 식물, 이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씨앗이 더 이상 없습니다.

You may ask, what state would that be in which there is no mind, there is no knowledge? What we call knowledge is a lower state than the one beyond knowledge. You must always bear in mind that the extremes look very much alike. If a very low vibration of ether is taken as darkness, an intermediate state as light, very high vibration will be darkness again. Similarly, ignorance is the lowest state, knowledge is the middle state, and beyond knowledge is the highest state, the two extremes of which seem the same. Knowledge itself is a manufactured something, a combination; it is not reality.
마음도 없고 지식도 없는 상태는 어떤 상태이겠습니까?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 너머의 상태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극단은 매우 비슷해 보인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에테르의 매우 낮은 진동을 어둠으로 간주하면 중간 상태를 빛으로, 매우 높은 진동을 다시 어둠으로 간주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지는 가장 낮은 상태이고, 지식은 중간 상태이며, 지식 너머는 가장 높은 상태이며, 그 두 극단은 같아 보입니다. 지식 자체는 제조된 것, 즉 조합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What is the result of constant practice of this higher concentration? All old tendencies of restlessness and dullness will be destroyed, as well as the tendencies of goodness too. The case is similar to that of the chemicals used to take the dirt and alloy off gold. When the ore is smelted down, the dross is burnt along with the chemicals. So this constant controlling power will stop the previous bad tendencies, and eventually, the good ones also. Those good and evil tendencies will suppress each other, leaving alone the Soul, in its own splendour untrammelled by either good or bad, the omnipresent, omnipotent, and omniscient. Then the man will know that he had neither birth nor death, nor need for heaven or earth. He will know that he neither came nor went, it was nature which was moving, and that movement was reflected upon the soul. The form of the light reflected by the glass upon the wall moves, and the wall foolishly thinks it is moving. So with all of us; it is the Chitta constantly moving making itself into various forms, and we think that we are these various forms. All these delusions will vanish. When that free Soul will command — not pray or beg, but command — then whatever It desires will be immediately fulfilled; whatever It wants It will be able to do. According to the Sankhya philosophy, there is no God. It says that there can be no God of this universe, because if there were one, He must be a soul, and a soul must be either bound or free. How can the soul that is bound by nature, or controlled by nature, create? It is itself a slave. On the other hand, why should the Soul that is free create and manipulate all these things? It has no desires, so it cannot have any need to create. Secondly, it says the theory of God is an unnecessary one; nature explains all. What is the use of any God? But Kapila teaches that there are many souls, who, though nearly attaining perfection, fall short because they cannot perfectly renounce all powers. Their minds for a time merge in nature, to re-emerge as its masters. Such gods there are. We shall all become such gods, and, according to the Sankhyas, the God spoken of in the Vedas really means one of these free souls. Beyond them there is not an eternally free and blessed Creator of the universe. On the other hand, the Yogis say, "Not so, there is a God; there is one Soul separate from all other souls, and He is the eternal Master of all creation, the ever free, the Teacher of all teachers." The Yogis admit that those whom the Sankhyas call "the merged in nature" also exist. They are Yogis who have fallen short of perfection, and though, for a time, debarred from attaining the goal, remain as rulers of parts of the universe.
이 더 높은 집중(concentration)를 지속적으로 수행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불안하고 둔감한 옛 성향은 모두 파괴될 것이며, 선한 성향도 파괴될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금에서 먼지와 합금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화학 물질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광석이 녹을 때 불순물은 화학물질과 함께 연소됩니다. 따라서 이 지속적인 통제력은 이전의 나쁜 경향을 멈추게 할 것이며, 결국에는 좋은 경향도 막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경향은 서로를 억압할 것이고, 선과 악, 편재하고 전능하고 전지한 것에 의해 구속받지 않고 그 자체의 광채를 지닌 영혼만 남겨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출생도 없고 죽음도 없고 하늘이나 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자연이었고 그 움직임은 영혼에 반영되었습니다. 벽에 부딪힌 유리에 반사된 빛의 형태가 움직이고, 벽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는 치타이며,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망상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이 명령할 때(기도하거나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때) 그것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성취될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캬 철학에 따르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는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영혼이어야 하고, 영혼은 묶여 있거나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얽매이고, 자연에 지배되는 영혼은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그 자체가 노예입니다. 반면에, 왜 자유로운 영혼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조작해야 합니까? 욕망이 없기 때문에 창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신론은 불필요한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카필라는 거의 완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힘을 완벽하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족한 영혼이 많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동안 자연과 합쳐져 자연의 주인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신이 될 것이며, 상키야(상캬)에 따르면 베다에서 말하는 신은 실제로 이러한 자유로운 영혼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들 외에는 영원히 자유롭고 축복받은 우주의 창조주가 없습니다. 반면에 요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영혼과 분리된 한 영혼이 있으며, 그는 모든 창조물의 영원한 주인이시며, 언제나 자유롭고, 모든 교사의 스승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요기들은 상키야(Sankhyas)가 '자연에 합쳐진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요기들이며, 한동안 목표 달성이 금지되었지만 우주의 일부를 다스리는 통치자로 남아 있습니다.

भव-प्रत्ययो विदेह-प्रकृतिलयानाम् ॥१९॥
bhavapratyayo videhaprakṛtilayānām
19. (This Samadhi when not followed by extreme non-attachment) becomes the cause of the re-manifestation of the gods and of those that become merged in nature.
[1.19] (이 사마띠는 극단적인 무집착이 따르지 않을 때) 신들과 자연에 합쳐진 신들의 재현현의 원인이 됩니다.

The gods in the Indian systems of philosophy represent certain high offices which are filled successively by various souls. But none of them is perfect.
인도 철학체계의 신들은 다양한 영혼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채워지는 특정한 높은 직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श्रद्धा-वीर्य-स्मृति-समाधि-प्रज्ञा-पूर्वक इतरेषाम् ॥२०॥
śraddhāvīryasmṛtisamādhiprajñāpūrvaka itareṣām
20. To others (this Samadhi) comes through faith, energy, memory, concentration, and discrimination of the real.
[1.20] 다른것들로는 (이 사마띠)는 믿음, 에너지, 기억, 집중, 실재에 대한 분별을 통해 옵니다.

These are they who do not want the position of gods or even that of rulers of cycles. They attain to liberation.
이들은 신의 지위나 심지어 주기의 통치자의 지위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해방을 얻습니다.


तीव्रसंवेगानामासन्नः ॥२१॥
tīvrasaṃvegānām āsannaḥ
21. Success is speedy for the extremely energetic.
[1.21] 매우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은 성공이 빠릅니다.

मृदुमध्याधिमात्रत्वात्ततोऽपि विशेषः ॥२२॥
mṛdumadhyādhimātratvāt tato 'pi viśeṣaḥ
22. The success of Yogis differs according as the means they adopt are mild, medium, or intense.
[1.22] 요기의 성공은 그들이 채택하는 수단이 온화함, 강렬함 그리고 그 중간에 따라 다릅니다.

ईश्वरप्रणिधानाद्वा ॥२३॥
īśvarapraṇidhānād vā
23. Or by devotion to Ishvara.
[1.23] 또는 이슈바라(ishvara)[31]에 대한 헌신으로.


क्लेशकर्मविपाकाशयैरपरामृष्टः पुरुषविशेष ईश्वरः ॥२४॥
kleśakarmavipākāśayair aparāmṛṣṭaḥ puruṣaviśeṣa īśvaraḥ
24. Ishvara (the Supreme Ruler) is a special Purusha, untouched by misery, actions, their results, and desires.
[1.24] 이슈바라(최고 통치자)는 비참함이나 행동, (어떤 원인들의)결과, 욕망에도 영향을 (결코)받지 않는 특별한 푸루샤(purusha)입니다.

We must again remember that the Pātanjala Yoga philosophy is based upon the Sankhya philosophy; only in the latter there is no place for God, while with the Yogis God has a place. The Yogis, however, do not mention many ideas about God, such as creating. God a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is not meant by the Ishvara of the Yogis. According to the Vedas, Ishvara is the Creator of the universe; because it is harmonious, it must be the manifestation of one will. The Yogis want to establish a God, but they arrive at Him in a peculiar fashion of their own. They say:
우리는 파탄잘라 요가 철학이 상키야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후자에만 신이 있을 자리가 없고 요기(yogi and yogini)들에게는 신이 있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기들은 창조와 같은 신에 관한 많은 개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신은 요기의 이슈바라가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다(텍스트)들Vedas에 따르면 이슈바라Ishvara는 우주의 창조자입니다. 조화롭기 때문에 하나의 의지가 표현되어야 합니다. 요기들은 신을 세우기를 원하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신에게 도달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तत्र निरतिशयं सर्वज्ञत्वबीजम् ॥२५॥
tatra niratiśayaṃ sarvajñabījam
25. In Him becomes infinite that all-knowingness which in others is (only) a germ.
[1.25]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싹인 모든 앎(알다,지식)이 그분(것) 안에서 무한해집니다.

The mind must always travel between two extremes. You can think of limited space, but that very idea gives you also unlimited space.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a little space; at the same time that you perceive the little circle, you have a circle round it of unlimited dimensions. It is the same with time. Try to think of a second; you will have, with the same act of perception, to think of time which is unlimited. So with knowledge. Knowledge is only a germ in man, but you will have to think of infinite knowledge around it, so that the very constitution of our mind shows us that there is unlimited knowledge, and the Yogis call that unlimited knowledge God.
마음은 항상 두 극단 사이를 여행해야 합니다. 제한된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아이디어는 무한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눈을 감고 작은 공간을 생각해 보십시요. 당신이 작은 원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주위에는 무한한 크기의 원이 있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동일한 인식 행위를 통해 무한한 시간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식에서 지식은 인간의 싹일 뿐이지만, 그 주위에 (나무가지처럼 뻗어나가는)무한한 지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구성 자체가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이 있음을 보여주고 요기들은 그 무한한 지식을 신(God)이라고 부릅니다.


स पूर्वेषामपि गुरुः कालेनानवच्छेदात् ॥२६॥
pūrveṣām api guruḥ kālenānavacchedāt
26. He is the Teacher of even the ancient teachers, being to limited by time.
[1.26] 그분(그것)은 (무한한 시간앞에서)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스승들의 스승이십니다.

It is true that all knowledge is within ourselves, but this has to be called forth by another knowledge. Although the capacity to know is inside us, it must be called out, and that calling out of knowledge can only be done, a Yogi maintains, through another knowledge. Dead, insentient matter never calls out knowledge, it is the action of knowledge that brings out knowledge. Knowing beings must be with us to call forth what is in us, so these teachers were always necessary. The world was never without them, and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them. God is the Teacher of all teachers, because these teachers, however great they may have been — gods or angels — were all bound and limited by time, while God is not. There are two peculiar deductions of the Yogis. The first is that in thinking of the limited, the mind must think of the unlimited; and that if one part of that perception is true, so also must the other be, for the reason that their value as perceptions of the mind is equal. The very fact that man has a little knowledge shows that God has unlimited knowledge. If I am to take one, why not the other? Reason forces me to take both or reject both. If I believe that there is a man with a little knowledge, I must also admit that there is someone behind him with unlimited knowledge. The second deduction is that no knowledge can come without a teacher. It is true, as the modern philosophers say, that there is something in man which evolves out of him; all knowledge is in man, but certain environments are necessary to call it out. We cannot find any knowledge without teachers. If there are men teachers, god teachers, or angel teachers, they are all limited; who was the teacher before them. We are forced to admit, as a last conclusion, one teacher who is not limited by time; and that One Teacher of infinite knowledge, without beginning or end, is called God.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지식에 의해 불러와져야 합니다. 아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야 하며, 지식을 불러내는 것은 다른 지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요기는 주장합니다. 죽고 무정한 물질은 결코 지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지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식의 작용입니다. 아는 존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불러내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므로 이러한 스승(선지자,선생님)은 항상 필요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 없이는 어떤 지식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사의 교사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교사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신이든 천사든) 모두 시간의 제약을 받고 제한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기들에게는 두 가지 독특한 추론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한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무한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각의 한 부분이 진실이라면 다른 부분도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지각으로서 그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식이 적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무한한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를 가져가야 한다면 다른 하나는 왜 안 됩니까? 이성은 나에게 둘 다 받아들이거나 둘 다 거부하도록 강요합니다.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뒤에 무한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추론은 교사 없이는 지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말했듯이, 인간(이전)에게서 진화하는 어떤 것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지식은 인간 안에 있지만, 그것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선생님 없이는 어떤 지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 교사, 신 교사, 천사 교사가 있다면 모두 제한됩니다. 그들보다 먼저 선생은 누구였습니까? 우리는 마지막 결론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한 명의 교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지식을 지닌 한 교사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तस्य वाचकः प्रणवः ॥२७॥
tasya vācakaḥ praṇavaḥ
27. His manifesting word is Om.
[1.27] 그것(분)의 명백한 소리[32][33]는 옴(om)[34][35][36]입니다.


Every idea that you have in the mind has a counterpart in a word; the word and the thought are inseparable. The external part of one and the same thing is what we call word, and the internal part is what we call thought. No man can, by analysis, separate thought from word. The idea that language was created by men — certain men sitting together and deciding upon words, has been proved to be wrong. So long as man has existed there have been words and language. What is the connection between an idea and a word? Although we see that there must always be a word with a thought, it is not necessary that the same thought requires the same word. The thought may be the same in twenty different countries, yet the language is different. We must have a word to express each thought, but these words need not necessarily have the same sound. Sounds will vary in different nations. Our commentator says, "Although the relation between thought and word is perfectly natural, yet it does not mean a rigid connection between one sound and one idea." These sounds vary, yet the relation between the sounds and the thoughts is a natural one. The connection between thoughts and sounds is good only if there be a real connection between the thing signified and the symbol; until then that symbol will never come into general use. A symbol is the manifester of the thing signified, and if the thing signified has already an existence, and if, by experience, we know that the symbol has expressed that thing many times, then we are sure that there is a real relation between them. Even if the things are not present, there will be thousands who will know them by their symbols. There must be a natural connection between the symbol and the thing signified; then, when that symbol is pronounced, it recalls the thing signified. The commentator says the manifesting word of God is Om. Why does he emphasise this word? There are hundreds of words for God. One thought is connected with a thousand words; the idea "God" is connected with hundreds of words, and each one stands as a symbol for God. Very good. But there must be a generalisation among all these words, some substratum, some common ground of all these symbols, and that which is the common symbol will be the best, and will really represent them all. In making a sound we use the larynx and the palate as a sounding board. Is there any material sound of which all other sounds must be manifestations, one which is the most natural sound? Om (Aum) is such a sound, the basis of all sounds. The first letter, A, is the root sound, the key, pronounced without touching any part of the tongue or palate; M represents the last sound in the series, being produced by the closed lips, and the U rolls from the very root to the end of the sounding board of the mouth. Thus, Om represents the whole phenomena of sound-producing. As such, it must be the natural symbol, the matrix of all the various sounds. It denotes the whole range and possibility of all the words that can be made. Apart from these speculations, we see that around this word Om are centred all the different religious ideas in India; all the various religious ideas of the Vedas have gathered themselves round this word Om. What has that to do with America and England, or any other country? Simply this, that the word has been retained at every stage of religious growth in India, and it has been manipulated to mean all the various ideas about God. Monists, dualists, mono-dualists, separatists, and even atheists took up this Om. Om has become the one symbol for the religious aspiration of the vast majority of human beings. Take, for instance, the English word God. It covers only a limited function, and if you go beyond it, you have to add adjectives, to make it Personal, or Impersonal, or Absolute God. So with the words for God in every other language; their signification is very small. This word Om, however, has around it all the various significances. As such it should be accepted by everyone.
당신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한마디로 대응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이고 동일한 것의 외부 부분을 우리는 말이라고 부르고, 내부 부분을 우리는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분석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생각과 말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언어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생각, 즉 특정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단어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37]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말과 언어가 있었습니다. 아이디어와 단어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입니까? 생각에는 항상 단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같은 생각이 같은 단어를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20개의 다른 나라에서도 생각은 동일할 수 있지만 언어는 다릅니다. 우리는 각각의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어야 하지만, 이 단어들이 반드시 같은 소리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는 국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석가는 "생각과 말 사이의 관계가 완벽하게 자연스러울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소리와 하나의 생각 사이의 엄격한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소리는 다양하지만 소리와 생각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각과 소리 사이의 연결은 의미하는 것과 상징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이 있을 때만 좋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기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징은 의미된 사물의 명시자이며, 의미된 사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경험을 통해 상징이 그 사물을 여러 번 표현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실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합니다.[38] 비록 물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상징을 통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수천 명에 달할 것입니다. 상징과 의미된 사물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상징이 발음되면 의미하는 것을 회상합니다. 주석가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옴(om)[39]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왜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단어는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은 천 개의 단어와 연결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수백 개의 단어와 연결되어 있으며 각 단어는 신을 상징합니다. 매우 좋은. 그러나 이 모든 단어들 사이에는 일반화가 있어야 하며, 이 모든 상징들의 일부 기반,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며, 공통 상징인 것이 가장 좋을 것이며 실제로 모든 상징을 대표할 것입니다. 소리를 낼 때 우리는 후두(성대)와 입천장을 공명판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모든 소리가 표현되어야 하는 물질적인 소리, 즉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가 있습니까? 옴(AUM=om)은 모든 소리의 기본이 되는 소리입니다. 첫 글자 A(아-)는 혀나 입천장에 닿지 않고 발음되는 근음, 즉 조성(調聲,key)입니다. M(음,받침 ㅁ)은 닫힌 입술에서 생성되는 시리즈의 마지막 소리를 나타내고 U(우-)는 입의 뿌리부터 공명판 끝까지 굴러갑니다. 따라서 om(옴)은 소리 생성의 전체 현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상징이요, 모든 다양한 소리의 모체임에 틀림없습니다. 만들 수 있는 모든 단어의 전체 범위와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추측과는 별개로 우리는 옴(om)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모든 다양한 종교적 사상이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의 다양한 종교적 사상은 모두 이 단어 '옴'을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것이 미국과 영국, 또는 다른 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인도의 종교적 성장의 모든 단계에서 유지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다양한 개념을 의미하도록 조작되었습니다. 일원론자, 이원론자, 단일이원론자, 분리주의자, 심지어 무신론자까지도 이 옴(ohm)을 채택했습니다. 옴은 대다수 인류의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God을 생각해 보세요. 제한된 기능만을 다루고,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형용사를 붙여서 인격적, 비인격적, 절대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언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는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옴이라는 단어는 (유용하게) 그 주변에(있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을수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쉽게) 받아들입니다.(사용할수있습니다)

तज्जपस्तदर्थभावनम् ॥२८॥
tajjapas tadarthabhāvanam
28. The repetition of this (Om) and meditating on its meaning (is the way).
[1.28] 이것(옴)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묵상(comtemplation)하는 것이 길(road)이 됩니다.

Why should there be repetition? We have not forgotten the theory of Samskaras, that the sum-total of impressions lives in the mind. They become more and more latent but remain there, and as soon as they get the right stimulus, they come out. Molecular vibration never ceases. When this universe is destroyed, all the massive vibrations disappear; the sun, moon, stars, and earth, melt down; but the vibrations remain in the atoms. Each atom performs the same function as the big worlds do. So even when the vibrations of the Chitta subside, its molecular vibrations go on, and when they get the impulse, come out again. We can now understand what is meant by repetition. It is the greatest stimulus that can be given to the spiritual Samskaras. "One moment of company with the holy makes a ship to cross this ocean of life." Such is the power of association. So this repetition of Om, and thinking of its meaning, is keeping good company in your own mind. Study, and then meditate on what you have studied. Thus light will come to you, the Self will become manifest.
왜 반복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인상의 총합이 마음 속에 산다는 삼스카라스(Samskaras) 이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잠복해 있다가 그 자리에 머물다가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바로 밖으로 나옵니다. 분자 진동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 우주가 파괴되면 모든 거대한 진동이 사라집니다. 해와 달과 별과 땅이 녹아내립니다. 그러나 진동은 원자에 남아 있습니다. (아주 아주 미소한)각 원자는 큰 세계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치타의 진동이 가라앉더라도 분자의 진동은 계속되고, 자극을 받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삼스카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극입니다. "성스러운 존재와 함께하는 한 순간은 이 생명의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듭니다." 이것이 연합의 힘입니다. 따라서 om을 반복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 속에 좋은 친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한 내용을 묵상하십시오. 그리하여 빛이 당신에게 올 것이고, 진정한 자아가 나타날 것입니다.

But one must think of Om, and of its meaning too. Avoid evil company, because the scars of old wounds are in you, and evil company is just the thing that is necessary to call them out. In the same way we are told that good company will call out the good impressions that are in us, but which have become latent. There is nothing holier in the world than to keep good company, because the good impressions will then tend to come to the surface.
그러나 우리는 옴과 그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악한 무리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오래된 상처의 (다 아물지않은)흉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한 무리는 그들을 꼭 반드시 불러내려고 할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좋은 친구는 우리 안에 있지만 잠재되어 있던 좋은 인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인상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ततः प्रत्यक्चेतनाधिगमोऽप्यन्तरायाभावश्च ॥२९॥
tataḥ pratyakcetanādhigamo 'py antarāyābhāvaś ca
29. From that is gained (the knowledge of) introspection, and the destruction of obstacles.
[1.29] 그것으로부터 성찰과 장애물의 파괴를 얻습니다.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repetition and thinking of Om is that the introspective power will manifest more and more, all the mental and physical obstacles will begin to vanish. What are the obstacles to the Yogi?
옴의 반복과 사고의 첫 번째 발현은 성찰의 힘이 점점 더 많이 발현되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장애물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요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व्याधि-स्त्यान-संशय-प्रमादालस्याविरति-भ्रान्तिदर्शनालब्धभूमिकत्वानवस्थितत्वानि चित्तविक्षेपास्तेऽन्तरायाः ॥३०॥ vyādhistyānasaṃśayapramādālasyāviratibhrāntidarśanālabdhabhūmikatvānavasthitatvāni cittavikṣepās te 'ntarāyāḥ
30. Disease, mental laziness, doubt, lack of enthusiasm, lethargy, clinging to sense-enjoyments, false perception, non-attaining concentration, and falling away from the state when obtained, are the obstructing distractions.
[1.30] 질병, 정신적 게으름, 의심, 열의 부족, 무기력,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집착, 잘못된 인식(인상), 집중을 얻지 못함, 얻었을 때 (도달한)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방해가 됩니다.

Disease. This body is the boat which will carry us to the other shore of the ocean of life. It must be taken care of. Unhealthy persons cannot be Yogis. Mental laziness makes us lose all lively interest in the subject, without which there will neither be the will nor the energy to practise. Doubts will arise in the mind about the truth of the science, however strong one's intellectual conviction may be, until certain peculiar psychic experiences come, as hearing or seeing at a distance, etc. These glimpses strengthen the mind and make the student persevere. Falling away … when obtained. Some days or weeks when you are practising, the mind will be calm and easily concentrated, and you will find yourself progressing fast. All of a sudden the progress will stop one day, and you will find yourself, as it were, stranded. Persevere. All progress proceeds by such rise and fall.
질병. 이 몸은 우리를 생명의 바다 반대편으로 데려갈 배입니다. 이것은 잘 다루어져야만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요기가 될 수 없습니다. 정신적 게으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한 모든 생생한 관심을 잃게 만들고, 그것이 없으면 연습할 의지도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과학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 마음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의 지적 확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멀리서 듣거나 보는 것과 같은 어떤 독특한 정신적 경험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하여)이러한 일별(日別)[40]은 마음을 강화하고 학생을 인내하게 만듭니다. (성취나 또는 결과를)획득 시… (점점)빠져듭니다.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수행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쉽게 집중되며 빠르게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어느 날 갑자기 진행이 중단되고, 말하자면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세요. 모든 발전은 이러한 상승과 하락을 통해 (상승하는 싸인(sine)곡선처럼) 진행됩니다.


दुःख-दौर्मनस्याङ्गमेजयत्व-श्वासप्रश्वासा विक्षेपसहभुवः ॥३१॥
duḥkhadaurmanasyāṅgamejayatvaśvāsapraśvāsā vikṣepasahabhuvaḥ
31. Grief, mental distress, tremor of the body, irregular breathing, accompany non-retention of concentration.
[1.31] 슬픔, 정신적 고통, 몸의 떨림, 불규칙한 호흡, 집중력 저하를 동반합니다.

Concentration will bring perfect repose to mind and body every time it is practised. When the practice has been misdirected, or not enough controlled, these disturbances come. Repetition of Om and self-surrender to the Lord will strengthen the mind, and bring fresh energy. The nervous shakings will come to almost everyone. Do not mind them at all, but keep on practising. Practice will cure them, and make the seat firm.
집중은 수행할 때마다 마음과 몸에 완벽한 휴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수행의 방향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히 통제되지 않았을 때 이러한 방해가 발생합니다. 옴을 반복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마음을 강화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가져올 것입니다. 긴장된 흔들림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연습하세요. 연습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자리가 확고해집니다.


तत्प्रतिषेधार्थमेकतत्त्वाभ्यासः ॥३२॥
tatpratiṣedhārtham ekatattvābhyāsaḥ
32. To remedy this, the practice of one subject (should be made).
[1.32]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한 주제(subject)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Making the mind take the form of one object for some time will destroy these obstacles. This is general advice. In the following aphorisms it will be expanded and particularised. As one practice cannot suit everyone, various methods will be advanced, and everyone by actual experience will find out that which helps him most.
마음이 한동안 하나의 대상의 형태를 취하게 하면 이러한 장애물이 파괴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조언입니다. 다음 [1.33]이후에서 그것은 확장되고 구체화될 것입니다. 한 가지 실천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할 수는 없으므로 다양한 방법이 발전하게 되며, 모든 사람은 실제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게(찾게) 될 것입니다.

मैत्री-करुणामुदितोपेक्षाणां सुख-दुःखपुण्यापुण्य-विषयाणां भावनातश्चित्तप्रसादनम् ॥३३॥
maitrīkaruṇāmuditopekṣāṇāṃ sukhaduḥkhapuṇyāpuṇyaviṣayāṇāṃ bhāvanātaś cittaprasādanam
33. Friendship, mercy, gladness, and indifference, being thought of in regard to subjects, happy, unhappy, good, and evil respectively, pacify the Chitta.
[1.33] 사랑(friendship), 연민(자비), 기쁨, 무관심이 각각 행복, 불행, 선, 악의 대상에 대해 생각되면 치타를 진정시킵니다.[41][42][43]


We must have these four sorts of ideas. We must have friendship for all; we must be merciful towards those that are in misery; when people are happy, we ought to be happy; and to the wicked we must be indifferent. So with all subjects that come before us. If the subject is a good one, we shall feel friendly towards it; if the subject of thought is one that is miserable, we must be merciful towards it. If it is good, we must be glad; if it is evil, we must be indifferent. These attitudes of the mind towards the different subjects that come before it will make the mind peaceful. Most of our difficulties in our daily lives come from being unable to hold our minds in this way. For instance, if a man does evil to us, instantly we want to react evil, and every reaction of evil shows that we are not able to hold the Chitta down; it comes out in waves towards the object, and we lose our power. Every reaction in the form of hatred or evil is so much loss to the mind; and every evil thought or deed of hatred, or any thought of reaction, if it is controlled, will be laid in our favour. It is not that we lose by thus restraining ourselves; we are gaining infinitely more than we suspect. Each time we suppress hatred, or a feeling of anger, it is so much good energy stored up in our favour; that piece of energy will be converted into the higher powers.
우리는 이 네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를 위해 사랑(우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참담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내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사람들이 행복하면 (그것으로만이)우리도 행복해야 합니다.(이것이 유일한 자신을 위한 행복의 조건이기때문입니다.)[44] 악인에게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오는 모든 주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주제가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호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대상이 비참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연민을 내보내야(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하다면 우리는 무관심해야 합니다. 앞에 오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마음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면 즉시 우리는 악하게 반응하기를 원하며, 악의 모든 반응은 우리가 치타를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물체를 향해 파도처럼 나오고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증오나 악의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반응은 마음에 너무나 큰 손실입니다. 모든 악한 생각이나 증오의 행위, 또는 어떤 반동적인 생각도 통제된다면 우리에게 유리(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제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오나 분노의 감정을 억누를 때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축적된 수많은 좋은 에너지입니다.[45] 그 에너지 조각은 더 높은 힘으로 변환됩니다.

प्रच्छर्दन-विधारणाभ्यां वा प्राणस्य ॥३४॥
pracchardanavidhāraṇābhyāṃ vā prāṇasya
34. By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Breath.
[1.34] 호흡을 내뿜고 억제(제어)함으로써

The word used is Prāna. Prana is not exactly breath. It is the name for the energy that is in the universe. Whatever you see in the universe, whatever moves or works, or has life, is a manifestation of this Prana. The sum-total of the energy displayed in the universe is called Prana. This Prana, before a cycle begins, remains in an almost motionless state; and when the cycle begins, this Prana begins to manifest itself. It is this Prana that is manifested as motion — as the nervous motion in human beings or animals; and the same Prana is manifesting as thought, and so on. The whole universe is a combination of Prana and Ākāsha; so is the human body. Out of Akasha you get the different materials that you feel and see, and out of Prana all the various forces. Now this throwing out and restraining the Prana is what is called Prānāyāma. Patanjali, the father of the Yoga philosophy, does not give very many particular directions about Pranayama, but later on other Yogis found out various things about this Pranayama, and made of it a great science. With Patanjali it is one of the many ways, but he does not lay much stress on it. He means that you simply throw the air out, and draw it in, and hold it for some time, that is all, and by that, the mind will become a little calmer. But, later on, you will find that out of this is evolved a particular science called Pranayama. We shall hear a little of what these later Yogis have to say.
사용된 단어는 프라나(prāna)입니다. 프라나는 엄밀히 말하면 호흡이 아닙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이름일뿐입니다. 당신이 우주에서 보는 것,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것, 생명을 갖고 있는 것 모두가 이 프라나의 표현입니다. 우주에 나타나는 에너지의 총합을 프라나(prana)[46]라고 합니다. 이 프라나는 주기가 시작되기 전에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주기가 시작되면 이 프라나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움직임, 즉 인간이나 동물의 신경적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프라나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프라나가 생각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프라나(Prana)와 아카샤(Ākāsha)[47]의 조합입니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카샤에서 당신은 느끼고 보는 다양한 물질을 얻고, 프라나에서는 모든 다양한 힘을 얻습니다. 이제 프라나를 내쫓고 억제하는 것을 프라나야마(Prānāyāma)라고 합니다. 요가 철학의 아버지인 파탄잘리(Patanjali)는 프라나야마(Pranayama)에 대해 별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다른 요기들이 이 프라나야마에 관한 다양한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위대한 과학으로 만들었습니다. 파탄잘리Patanjali의 경우 이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많은 강조를 두지 않습니다. 단순히 공기를 내뿜고, 끌어들이고, 잠시 동안 유지하면 마음이 조금 더 고요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분은 이로부터 프라나야마(pranayama)라는 특별한 과학(이자 요가시스템으로 불리는것)이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요기들이 말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될 것입니다.

Some of this I have told you before, but a little repetition will serve to fix it in your minds. First, you must remember that this Prana is not the breath; but that which causes the motion of the breath, that which is the vitality of the breath, is the Prana. Again, the word Prana is used for all the senses; they are all called Pranas, the mind is called Prana; and so we see that Prana is force. And yet we cannot call it force, because force is only the manifestation of it. It is that which manifests itself as force and everything else in the way of motion. The Chitta, the mind-stuff, is the engine which draws in the Prana from the surroundings, and manufactures out of Prana the various vital forces — those that keep the body in preservation — and thought, will, and all other powers. By the above mentioned process of breathing we can control all the various motions in the body, and the various nerve currents that are running through the body. First we begin to recognise them, and then we slowly get control over them.
이 중 일부는 이전에 말씀드렸지만, 약간의 반복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내용을 고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이 프라나는 호흡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흡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 즉 호흡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 프라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프라나prana라는 단어는 모든 감각에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프라나(Pranas)라고 불리며, (역시 또한)마음은 프라나(Prana)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라나가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은 단지 힘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힘과 운동 방식의 다른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재료인 치타(Chitta)는 주변 환경에서 프라나를 끌어들이고 프라나에서 신체를 보존하는 다양한 생명력과 생각, 의지 및 기타 모든 힘을 생산하는 엔진(engine)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호흡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신체의 모든 다양한 움직임과 신체를 흐르는 다양한 신경 흐름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것을 인식(인지)하기 시작(해야)하고 (그리고나서)그 다음에는 천천히 통제하게 됩니다.

Now, these later Yogis consider that there are three main currents of this Prana in the human body. One they call Idā, another Pingalā, and the third Sushumnā. Pingala, according to them, is on the right side of the spinal column, and the Ida on the left, and in the middle of the spinal column is the Sushumna, an empty channel. Ida and Pingala, according to them, are the currents working in every man, and through these currents, we are performing all the functions of life. Sushumna is present in all, as a possibility; but it works only in the Yogi. You must remember that Yoga changes the body. As you go on practising, your body changes; it is not the same body that you had before the practice. That is very rational, and can be explained, because every new thought that we have must make, as it were, a new channel through the brain, and that explains the tremendous conservatism of human nature. Human nature likes to run through the ruts that are already there, because it is easy. If we think, just for example's sake, that the mind is like a needle, and the brain substance a soft lump before it, then each thought that we have makes a street, as it were, in the brain, and this street would close up, but for the grey matter which comes and makes a lining to keep it separate. If there were no grey matter, there would be no memory, because memory means going over these old streets, retracing a thought as it were. Now perhaps you have marked that when one talks on subjects in which one takes a few ideas that are familiar to everyone, and combines and recombines them, it is easy to follow because these channels are present in everyone's brain, and it is only necessary to recur them. But whenever a new subject comes, new channels have to be made, so it is not understood readily. And that is why the brain (it is the brain, and not the people themselves) refuses unconsciously to be acted upon by new ideas. It resists. The Prana is trying to make new channels, and the brain will not allow it. This is the secret of conservatism. The fewer channels there have been in the brain, and the less the needle of the Prana has made these passages, the more conservative will be the brain, the more it will struggle against new thoughts. The more thoughtful the man, the more complicated will be the streets in his brain, and the more easily he will take to new ideas, and understand them. So with every fresh idea, we make a new impression in the brain, cut new channels through the brain-stuff, and that is why we find that in the practice of Yoga (it being an entirely new set of thoughts and motives) there is so much physical resistance at first. That is why we find that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world-side of nature is so widely accepted, while the other part, the philosophy, or the psychology, which deals with the inner nature of man, is so frequently neglected.
이제 후기 요기들은 인체에 이 프라나의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다Idā, 다른 하나는 핑갈라Pingalā, 세 번째는 수슘나Sushumnā라고 부릅니다. 그들에 따르면 핑갈라(Pingala)는 척주의 오른쪽에 있고 이다(Ida)는 왼쪽에 있으며 척주 중앙에는 빈 통로인 수슘나(Sushumna)가 있다고 기술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다Ida와 핑갈라Pingala는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흐름이며, 이러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슘나는 모든 것 속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기에서만 작동합니다. 요가가 몸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 수행하면 몸이 변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수련하기 전과 같은 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설명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새로운 생각은 말하자면 뇌를 통해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엄청난 보수성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틀을 헤쳐나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은 바늘과 같고 뇌 물질은 그 앞에 부드러운 덩어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생각은 말하자면 뇌에 길을 만들고 (지나갈수있겠지만)이 길은 (곧 다시 채워져)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와서 안감을 만들어 별도로 유지하는 회색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 회백질이 없다면 기억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이 오래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생각을 되짚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마도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친숙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취하여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채널이 모든 사람의 두뇌에 존재하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다는 것을 표시했을 것입니다. 반복하십시오.[48] 그런데 새로운 주제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뇌(사람 자신이 아닌 뇌)가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각에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저항합니다. 프라나는 새로운 채널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비결입니다. 뇌에 존재하는 채널의 수가 적고 프라나의 바늘이 이러한 통로를 통과하는 횟수가 적을수록 뇌는 더욱 보수적이 될 것이며 새로운 생각에 맞서 더 많이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49] 사람이 더 사려 깊을수록 그의 두뇌 속의 거리는 더 복잡해질 것이고, 그는 더 쉽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선한 아이디어로 우리는 뇌에 새로운 인상을 남기고 이러한 뇌의 내용(작용)을 통해 새로운 채널을 (만들어)끊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완전히 새로운 생각과 동기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물리적 저항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세계적 측면을 다루는 종교의 한 부분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반면,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다루는 다른 부분인 철학이나 심리학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We must remember the definition of this world of ours; it is only the Infinite Existence projected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A little of the Infinite is projected into consciousness, and that we call our world. So there is an Infinite beyond; and religion has to deal with both — with the little lump we call our world, and with the Infinite beyond. Any religion which deals with one only of these two will be defective. It must deal with both.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part of the Infinite which has come into the plane of consciousness, got itself caught, as it were, in the plane of consciousness, in the cage of time, space, and causation, is quite familiar to us, because we are in that already, and ideas about this world have been with us almost from time immemorial. The part of religion which deals with the Infinite beyond comes entirely new to us, and getting ideas about it produces new channels in the brain, disturbing the whole system, and that is why you find in the practice of Yoga ordinary people are at first turned out of their grooves. In order to lessen these disturbances as much as possible, all these methods are devised by Patanjali, that we may practise any one of them best suited to us.
우리는 이 세상의 정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식계에 투사된 무한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한의 작은 부분이 의식 속으로 투영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 너머에는 무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우리가 세상(삶,생명)이라고 부르는 작은 덩어리와 그 너머의 무한함, 이 두 가지를 모두 다루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만 다루는 종교는 결함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두 가지 모두를 다루어야 합니다. 의식계로 들어왔다가 의식계, 즉 시간, 공간, 인과의 우리(cage,틀)에 갇힌 무한의 부분을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은 거의 태곳적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너머를 다루는 종교의 부분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면 뇌에 새로운 채널이 생성되어 전체 시스템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요가 수련에서 보통 사람들이 처음에 방향을 바꾸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움푹한) 홈(groove)에서[50] 가능한 한 이러한 방해를 줄이기 위해 이 모든 방법은 파탄잘리Patanjali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우리는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विषयवती वा प्रवृत्तिरुत्पन्ना मनसः स्थितिनिबन्धिनी ॥३५॥
viṣayavatī vā pravṛttir utpannā manasaḥ sthitinibandhanī
35. Those forms of concentration that bring extraordinary sense-perceptions cause perseverance of the mind.
[1.35] 특별한 감각 지각을 가져오는 집중 형태는 마음의 지속성을 유발합니다.

This naturally comes with Dhāranā, concentration; the Yogis say, if the mind becomes concentrated on the tip of the nose, one begins to smell, after a few days, wonderful perfumes. If it becomes concentrated at the root of the tongue, one begins to hear sounds; if on the tip of the tongue, one begins to taste wonderful flavours; if on the middle of the tongue, one feels as if one were coming in contact with something. If one concentrates one's mind on the palate, one begins to see peculiar things. If a man whose mind is disturbed wants to take up some of these practices of Yoga, yet doubts the truth of them, he will have his doubts set at rest when, after a little practice, these things come to him, and he will persevere.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라나(dhāranā)[51], 즉 집중과 함께 옵니다. 수행자들은 마음이 코끝에 집중되면 며칠 후에 멋진 향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혀의 뿌리에 집중되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혀 끝에는 놀라운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혀 한가운데에서는 뭔가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미각에 정신을 집중하면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사람이 요가 수행 중 일부를 수행하고 싶지만 그 진리를 의심한다면, 약간의 수행 후에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다가올 때 그의 의심은 안정될 것이며 인내할 것입니다.


विशोका वा ज्योतिष्मती ॥३६॥
viśokā vā jyotiṣmatī
36. Or (by the meditation on) the Effulgent Light, which is beyond all sorrow.
[1.36] 또는 (묵상함으로써) 모든 슬픔을 초월하는 찬란한 빛.

This is another sort of concentration. Think of the lotus of the heart, with petals downwards, and running through it, the Sushumna; take in the breath, and while throwing the breath out imagine that the lotus is turned with the petals upwards, and inside that lotus is an effulgent light. Meditate on that.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집중입니다. 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그 속을 흐르는 수슘나(Sushumna)를 생각해보세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연꽃이 꽃잎을 위로 향하게 되어 있고, 그 연꽃 안에는 찬란한 빛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에 대해 묵상(상상)해 보세요.


वीतरागविषयं वा चित्तम् ॥३७॥
vītarāgaviṣayaṃ vā cittam
37. Or (by meditation on) the heart that has given up all attachment to sense-objects.
[1.37] 또는 (명상을 통해) 감각 대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포기한 마음

Take some holy person, some great person whom you revere, some saint whom you know to be perfectly non-attached, and think of his heart. That heart has become non-attached, and meditate on that heart; it will calm the mind. If you cannot do that, there is the next way:
어떤 거룩한 사람, 당신이 존경하는 어떤 위대한 사람, 당신이 아는(상상할수있는) 어떤 (아이디얼한(ideal)거룩한)성자,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고 여길수있는) 사람(존재)을 데리고와서(떠올려서)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마음은 집착이 없어지고, 그 마음을 묵상(상상)하십시오. 그것은 마음을 진정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다음 방법이 있습니다.


स्वप्ननिद्राज्ञानालम्बनं वा ॥३८॥
svapnanidrājñānālambanaṃ vā
38. Or by meditating on the knowledge that comes in sleep.
[1.38] 또는 잠 속에서 오는 지식을 묵상함으로써

Sometimes a man dreams that he has seen angels coming to him and talking to him, that he is in an ecstatic condition, that he has heard music floating through the air. He is in a blissful condition in that dream, and when he wakes, it makes a deep impression on him. Think of that dream as real, and meditate upon it. If you cannot do that, meditate on any holy thing that pleases you.
때때로 어떤 사람은 천사가 자신에게 와서 말을 거는 것을 보았고, 황홀한 상태에 있으며, 공중에 떠다니는 음악을 듣는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그는 행복한 상태에 있었고, 깨어났을 때 그 꿈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상상(묵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마음에 드는 거룩한 일을 묵상해보십시요.


यथाभिमतध्यानाद्वा ॥३९॥
yathābhimatadhyānād vā
39. Or by the meditation on anything that appeals to one as good.
[1.39] 또는 자신에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드야나(dhyana)[52]함으로써(상상해봄으로써).

This does not mean any wicked subject, but anything good that you like, any place that you like best, any scenery that you like best, any idea that you like best, anything that will concentrate the mind.
이는 나쁜 주제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좋은 것,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풍경, 가장 좋아하는 아이디어,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परमाणु परममहत्त्वान्तोऽस्य वशीकारः ॥४०॥
paramāṇuparamamahattvānto 'sya vaśīkāraḥ
40. The Yogi's mind thus meditating, becomes unobstructed from the atomic to the infinite.
[1.40] 이렇게 명상하는 요기의 마음은 원자에서 무한까지 방해받지 않게 됩니다.

The mind, by this practice, easily contemplates the most minute, as well as the biggest thing. Thus the mind-waves become fainter.
이 수행을 통해 마음은 가장 큰 것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것까지 쉽게 숙고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파동은 (점점)더 희미해집니다.

क्षीणवृत्तेरभिजातस्येव मणेर्ग्रहीतृ-ग्रहण-ग्राह्येषु तत्स्थ-तदञ्जनता समापत्तिः ॥४१॥
kṣīṇavṛtter abhijātasyeva maṇer grahītṛgrahaṇagrāhyeṣu tatsthatadañjanatā samāpattiḥ
41. The Yogi whose Vrittis have thus become powerless (controlled) obtains in the receiver, (the instrument of) receiving, and the received (the Self, the mind, and external objects), concentratedness and sameness like the crystal(before different coloured objects).
[1.41] 브리티스[53]가 무력해진(통제된) 수행자는 받는자, 전달자(의 도구), 받아들여진것(자아, 마음, 외부 대상)에서 (어떤 색깔을 띄는 대상과 다른)수정과 같은 집중과 동일성을 얻습니다.

What results from this constant meditation? We must remember how in a previous aphorism Patanjali went into the various states of meditation, how the first would be the gross, the second the fine, and from them the advance was to still finer objects. The result of these meditations is that we can meditate as easily on the fine as on the gross objects. Here the Yogi sees the three things, the receiver, the received, and the receiving instrument, corresponding to the Soul, external objects, and the mind. There are three objects of meditation given us. First, the gross things, as bodies, or material objects; second, fine things, as the mind, the Chitta; and third, the Purusha qualified, not the Purusha itself, but the Egoism. By practice, the Yogi gets established in all these meditations. Whenever he meditates he can keep out all other thoughts, he becomes identified with that on which he meditates. When he meditates, he is like a piece of crystal. Before flowers the crystal becomes almost identified with the flowers. If the flower is red, the crystal looks red, or if the flower is blue, the crystal looks blue.
이러한 끊임없는 명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언급된) 절(verse)들에서 파탄잘리가 어떻게 다양한 명상 상태에 들어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거칠고 두 번째는 미세한 것이며, 그로부터 더 미세한 대상으로 발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명상의 결과로 우리는 거친 대상에 대해서만큼 미세한 것에 대해서도 쉽게 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요기는 영혼, 외부 대상, 마음에 해당하는 수신자, 피수신자(받아들여진 어떤것), 수(발)신 도구(인 전달자)의 세 가지를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상의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신체 또는 물질적 대상과 같은 거친 것. 둘째, 마음, 치타(Chitta)와 같은 좋은 것. 셋째, 푸루샤 자체는 아니지만 자아 자신이 푸루샤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수행을 통해 요기는 이 모든 명상을 통해 확립됩니다. 명상할 때마다 그는 다른 모든 생각을 차단할 수 있으며, 명상하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그가 명상할 때, 그는 수정 조각과 같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결정이 꽃과 거의 동일시됩니다. 꽃이 빨간색이면 크리스탈이 빨간색으로 보이고, 꽃이 파란색이면 크리스탈이 파란색으로 보입니다.


तत्र शब्दार्थज्ञानविकल्पैः सङ्कीर्णा सवितर्का समापत्तिः ॥४२॥
tatra śabdārthajñānavikalpaiḥ saṃkīrṇā savitarkā samāpattiḥ
42. Sound, meaning, and resulting knowledge, being mixed up, is (called) Samadhi with question.
[1.42] 소리, 의미, 그리고 그에 따른 지식이 뒤섞여 있는 것을 질문-사마띠라고 합니다.

Sound here means vibration, meaning the nerve currents which conduct it; and knowledge, reaction. All the various meditations we have had so far, Patanjali calls Savitarka (meditation with question). Later on he gives us higher and higher Dhyānas. In these that are called "with question," we keep the duality of subject and object, which results from the mixture of word, meaning, and knowledge. There is first the external vibration, the word. This, carried inward by the sense currents, is the meaning. After that there comes a reactionary wave in the Chitta, which is knowledge, but the mixture of these three makes up what we call knowledge. In all the meditations up to this we get this mixture as objects of meditation. The next Samadhi is higher.
여기서 소리는 진동, 즉 진동을 전달하는 신경 전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식, 반응.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모든 다양한 명상을 파탄잘리Patanjali는 사비타르카Savitarka(질문이 있는 명상)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그분은 우리에게 점점 더 높은 성찰[54]을 주십니다. 질문이 있는 이들에서는 말과 의미, 지식이 뒤섞여 발생하는 주체와 객체의 이중성을 유지합니다. 먼저 외부 진동, 즉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감각 전류에 의해 내부로 전달되는 의미입니다. 그 후 치타에는 지식이라는 반동적인 물결이 오는데, 이 세 가지의 혼합이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합니다. 여기까지의 모든 명상에서 우리는 이 혼합물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음 사마띠(삼매)는 더 높습니다.


स्मृतिपरिशुद्धौ स्वरूपशून्येवार्थमात्रनिर्भासा निर्वितर्का ॥४३॥
smṛtipariśuddhau svarūpaśūnyevārthamātranirbhāsā nirvitarkā
43. The Samadhi called "without question" (comes) when the memory is purified, or devoid of qualities, expressing only the meaning (of the meditated object).
[1.43] 기억이 정화되거나 특성이 없고 (명상 대상의) 의미만 표현할 때 '질문 없는'이라고 불리는 사마띠(삼매)입니다.

It is by the practice of meditation of these three that we come to the state where these three do not mix. We can get rid of them. We will first try to understand what these three are. Here is the Chitta; you will always remember the simile of the mind-stuff to a lake, and the vibration, the word, the sound, like a pulsation coming over it. You have that calm lake in you, and I pronounce a word, "Cow". As soon as it enters through your ears there is a wave produced in your Chitta along with it. So that wave represents the idea of the cow, the form or the meaning as we call it. The apparent cow that you know is really the wave in the mind-stuff that comes as a reaction to the internal and external sound vibrations. With the sound, the wave dies away; it can never exist without a word. You may ask how it is, when we only think of the cow, and do not hear a sound. You make that sound yourself. You are saying "cow" faintly in your mind, and with that comes a wave. There cannot be any wave without this impulse of sound; and when it is not from outside, it is from inside, and when the sound dies, the wave dies. What remains? The result of the reaction, and that is knowledge. These three are so closely combined in our mind that we cannot separate them. When the sound comes, the senses vibrate, and the wave rises in reaction; they follow so closely upon one another that there is no discerning one from the other. When this meditation has been practised for a long time, memory, the receptacle of all impressions, becomes purified, and we are able clearly to distinguish them from one another. This is called Nirvitarka, concentration without question.
우리가 이 세 가지가 섞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명상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세 가지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여기 치타가 있습니다. 당신은 호수에 대한 마음의 비유와 그 위로 다가오는 파동과 같은 진동, 말, 소리를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 안에는 고요한 호수가 있고 나는 '소'라는 단어를 발음합니다. 그것이 귀를 통해 들어오자마자 치타에도 파동이 생성됩니다. 그래서 그 파도는 소의 개념, 우리가 부르는 형태 또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겉보기 소는 실제로 내부 및 외부 소리 진동에 대한 반응으로 오는 마음의 파동입니다. 소리와 함께 파도는 사라집니다. 그것은 말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소만 생각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어떠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 (소리가 없는)그런 소리를 내는군요. 당신은 마음속으로 희미하게 '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파도가 옵니다. 이러한 소리의 충동 없이는 어떤 파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소리가 죽으면 파도도 죽는것입니다.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반응의 결과,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마음 속에서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오면 감각이 진동하고 반작용으로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밀접하게 따르기 때문에 서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 명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 모든 인상의 저장소인 기억이 정화되고,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니르비타르카(Nirvitarka), 즉 '의심할 여지 없는 집중'이라고 합니다.


एतयैव सविचारा निर्विचारा च सूक्ष्मविषया व्याख्याता ॥४४॥
etayaiva savicārā nirvicārā ca sūkṣmaviṣayā vyākhyātā
44. By this process, (the concentrations) with discrimination and without discrimination, whose objects are finer, are (also) explained.
[1.44] 이 과정을 통해 대상이 더 미세한 차별이 있는 집중과 그렇지 않은 집중이 (또한) 설명됩니다.

A process similar to the preceding is applied again; only, the objects to be taken up in the former meditations are gross; in this they are fine.
이전과 유사한 프로세스가 다시 적용됩니다. 다만 이전 명상에서 다루어야 할 대상은 조잡합니다. 이것으로 괜찮습니다.


सूक्ष्मविषयत्वञ्चालिङ्ग-पर्यवसानम् ॥४५॥
sūkṣmaviṣayatvaṃ cāliṅgaparyavasānam
45. The finer objects end with the Pradhāna.
[1.45] 더 미세한 물체는 프라다나Pradhāna로 끝납니다.


The gross objects are only the elements and everything manufactured out of them. The fine objects begin with the Tanmatras or fine particles. The organs, the mind,[1] egoism, the mind-stuff (the cause of all manifestation), the equilibrium state of Sattva, Rajas, and Tamas materials — called Pradhāna (chief), Prakriti (nature), or Avyakta (unmanifest) — are all included within the category of fine objects, the Purusha (the Soul) along being excepted.
총체적인 물체는 단지 요소와 그 요소로 만들어진 모든 것입니다. 미세한 물체는 탄마트라(Tanmatras) 또는 미세한 입자로 시작됩니다. 기관, 마음, 자기자신, 정신 물질(모든 발현의 원인),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및 타마스Tamas 물질의 평형 상태 — 프라다나Pradhāna(최고), 프라크리티Prakriti(자연) 또는 아비아크타Avyakta(비현현非顯現)[55]라고 함 ) — 모두 미세한 물체의 범주에 포함되며 푸루샤(영혼)는 제외됩니다.


ता एव सबीजः समाधिः ॥४६॥
tā eva sabījaḥ samādhiḥ
46. These concentrations are with seed.
[1.46] 이 집중은 (모든)종자(근원)에 대한 집중입니다.

These do not destroy the seeds of past actions, and thus cannot give liberation, but what they bring to the Yogi is stated in the following aphorism.
이것들은 과거 행위의 씨앗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해방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기에게 가져오는 것은 다음 절(verse)[1.47]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निर्विचार-वैशारद्येऽध्यात्मप्रसादः ॥४७॥
nirvicāravaiśāradye 'dhyātmaprasādaḥ
47. The concentration "without discrimination" being purified, the Chitta becomes firmly fixed.
[1.47] '분별 없는' 집중이 정화되면 치타가 굳건해집니다.

ऋतम्भरा तत्र प्रज्ञा ॥४८॥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
48. The knowledge in that is called "filled with Truth".
[1.48]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진리로 가득 찬' 지식이라고 합니다.

The next aphorism will explain this.
다음 절(verse)[1.48]이 이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

श्रुतानुमानप्रज्ञाभ्यामन्यविषया विशेषार्थत्वात् ॥४९॥
śrutānumānaprajñābhyām anyaviṣayā viśeṣārthatvāt
49. The knowledge that is gained from testimony and inference is about common objects. That from the Samadhi just mentioned is of a much higher order, being able to penetrate where inference and testimony cannot go.
[1.49] 증명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지식은 공통된 대상에 관한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사마띠는 추론과 증명이 갈 수 없는 곳까지 꿰뚫을 수 있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것입니다.

The idea is that we have to get our knowledge or ordinary objects by direct perception, and by inference therefrom, and from testimony of people who are competent. By "people who are competent", the Yogis always mean the Rishis, or the Seers of the thoughts recorded in the scriptures — the Vedas. According to them, the only proof of the scriptures is that they were the testimony of competent persons, yet they say the scriptures cannot take us to realisation. We can read all the Vedas, and yet will not realise anything, but when we practise their teachings, then we attain to that state which realises what the scriptures say, which penetrates where neither reason nor perception nor inference can go, and where the testimony of others cannot avail.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aphorism.
그 생각은 우리가 직접적인 인식과 추론, 유능한 사람들의 증명을 통해 지식이나 일반적인 대상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들'이란 요가 수행자들은 항상 리시(Rishis), 즉 경전, 즉 베다(와 같은 텍스트(text)로 기술된)에 기록된(성문화된) 생각을 보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의 유일한 증거는 능력 있는 사람들의 간증뿐인데, 성경은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베다를 읽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지만, 그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는 경전이 말하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경전은 이성도 지각도 추론도 갈 수 없는 곳, 간증이 있는 곳을 꿰뚫는 곳입니다. 다른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격언의 의미입니다.

Realisation is real religion, all the rest is only preparation — hearing lectures, or reading books, or reasoning is merely preparing the ground; it is not religion. Intellectual assent and intellectual dissent are not religion. The central idea of the Yogis is that just as we come in direct contact with objects of the senses, so religion even can be directly perceived in a far more intense sense. The truths of religion, as God and Soul, cannot be perceived by the external senses. I cannot see God with my eyes, nor can I touch Him with my hands, and we also know that neither can we reason beyond the senses. Reason leaves us at a point quite indecisive; we may reason all our lives, as the world has been doing for thousands of years, and the result is that we find we are incompetent to prove or disprove the facts of religion. What we perceive directly we take as the basis, and upon that basis we reason. So it is obvious that reasoning has to run within these bounds of perception. It can never go beyond. The whole scope of realisation, therefore, is beyond sense-perception. The Yogis say that man can go beyond his direct sense-perception, and beyond his reason also. Man has in him the faculty, the power, of transcending his intellect even, a power which is in every being, every creature. by the practice of Yoga that power is aroused, and then man transcends the ordinary limits of reason, and directly perceives things which are beyond all reason.
깨달음은 진짜 종교이고, 나머지는 모두 준비일 뿐입니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거나, 추론하는 것은 단지 기초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지적 동의와 지적 반대는 종교가 아닙니다. 요기의 핵심 개념은 우리가 감각의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처럼 종교도 훨씬 더 강렬한 의미로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과 영혼으로서의 종교의 진리는 외부 감각으로 인식될 수 없습니다. 나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며, 감각을 초월하여 추론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성은 우리를 매우 우유부단한 지점에 놓이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평생 동안 추론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종교의 사실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인식한 것을 기초로 삼고, 그 기초 위에서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추론이 이러한 인식의 범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전체 범위는 감각-지각을 초월합니다. 요기들은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감각 지각과 이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초월하는 능력과 능력, 즉 모든 존재와 모든 창조물 안에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가 수련을 통해 힘이 일깨워지고 인간은 일반적인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사물을 직접 인식하게 됩니다.


तज्जः संस्कारोऽन्यसंस्कारप्रतिबन्धी ॥५०॥
tajjaḥ saṃskāro 'nyasaṃskārapratibandhī
50. The resulting impression from this Samadhi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
[1.50] 이 사마띠(samadhi)에서 얻은 인상(印象)은 다른 모든 인상(印象)을 방해(제지)합니다.

We have seen in the foregoing aphorism that the only way of attaining to that superconsciousness is by concentration, and we have also seen that what hinders the mind from concentration are the past Samskaras, impressions. All of you have observed that, when you are trying to concentrate your mind, your thoughts wander. When you are trying to think of God, that is the very time these Samskaras appear. At other times they are not so active; but when you want them not, they are sure to be there, trying their best to crowd in your mind. Why should that be so? Why should they be much more potent at the time of concentration? It is because you are repressing them, and they react with all their force. At other times they do not react. How countless these old past impressions must be, all lodged somewhere in the Chitta, ready, waiting like tigers, to jump up! These have to be suppressed that the one idea which we want may arise, to the exclusion of the others. Instead they are all struggling to come up at the same time. These are the various powers of the Samskaras in hindering concentration of the mind. So this Samadhi which has just been given is the best to be practised, on account of its power of suppressing the Samskaras. The Samskara which will be raised by this sort of concentration will be so powerful that it will hinder the action of the others, and hold them in check.
우리는 위의 절(verse)에서 그 초의식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집중이라는 것을 보았고,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삼스카라, 즉 인상이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마음을 집중하려고 할 때 생각이 방황한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당신이 신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 바로 이 삼스카라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다지 활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지 않을 때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있어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집중할 때 훨씬 더 강력해야 합니까? 당신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고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때에는 그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 오래된 과거의 인상들은 얼마나 무수히 많을 것이며 모두 치타 어딘가에 자리잡고 호랑이처럼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를 배제하고 나타날 수 있도록 이러한 것들을 억제해야 합니다. 대신 그들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집중을 방해하는 삼스카라의 다양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주어진 이 사마띠는 삼스카라를 억제하는 힘 때문에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사마띠입니다. 이런 집중을 통해 키워지는 삼스카라는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이들의 행동을 방해하고 견제할 것입니다.


तस्यापि निरोधे सर्वनिरोधान्निर्बीजः समाधिः ॥५१॥
tasyāpi nirodhe sarvanirodhān nirbījaḥ samādhiḥ
51. By the restraint of even this (impression, which obstructs all other impressions), all being restrained, comes the "seedless" Samadhi.
[1.51] 이 것(다른 모든 인상을 방해하는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모든 것이 억제될때 '씨 없는' 사마띠가 나옵니다.[56]

You remember that our goal is to perceive the Soul itself. We cannot perceive the Soul, because it has got mingled up with nature, with the mind, with the body. The ignorant man thinks his body is the Soul. The learned man thinks his mind is the Soul. But both of them are mistaken. What makes the Soul get mingled up with all this? Different waves in the Chitta rise and cover the Soul; we only see a little reflection of the Soul through these waves; so, if the wave is one of anger, we see the Soul as angry; "I am angry," one says. If it is one of love, we see ourselves reflected in that wave, and say we are loving. If that wave is one of weakness, and the Soul is reflected in it, we think we are weak. These various ideas come from these impressions, these Samskaras covering the Soul. The real nature of the Soul is not perceived as long as there is one single wave in the lake of the Chitta; this real nature will never be perceived until all the waves have subsided. So, first, Patanjali teaches us the meaning of these waves; secondly, the best way to repress them; and thirdly, how to make one wave so strong as to suppress all other waves, fire eating fire as it were. When only one remains, it will be easy to suppress that also, and when that is gone, this Samadhi or concentration is called seedless. It leaves nothing, and the Soul is manifested just as It is, in Its own glory. Then alone we know that the Soul is not a compound; It is the only eternal simple in the universe, and as such, It cannot be born, It cannot die; It is immortal, indestructible, the ever-living essence of intelligence.
당신은 우리의 목표가 영혼 자체를 인식하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자연, 마음, 육체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몸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다 착각입니다. 영혼이 이 모든 것에 뒤섞이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치타Chitta의 다양한 파도가 일어나 영혼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파동을 통해 영혼의 작은 반영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파도가 분노의 파도라면 우리는 영혼을 분노한 것으로 봅니다. “나는 화가 난다”고 한 사람은 (그렇게)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 파도에 비친 우리 자신을 보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파도가 약함의 파도이고 그 안에 영혼이 반영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는 이러한 인상, 즉 영혼을 덮고 있는 삼스카라에서 나옵니다. 치타 호수에 단 하나의 파도가(파도라도 남아) 있는 한 영혼의 진정한 본질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 실제 자연은 모든 파도가 가라앉을 때까지 결코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파탄잘리는 우리에게 이 파도의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둘째, 그들을 억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불이 불을 삼키는 것처럼 하나의 파도를 다른 모든 파도를 억제할 만큼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나만 남으면 (이제)그것 역시 (하나만 남았으므로)억제하기 쉬우며, 그것이 없어지면 그 사마티, 즉 그 집중을 니르비자 사마띠nirbīja samādhi(씨앗조차 남아있지않은 사마띠,씨없는 사마띠)[57]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영혼은 그 자체의 영광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혼이 복합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영원하고 단순한 존재이므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불멸이고, 파괴할 수 없으며, 영원히 살아 있는 지능의 본질입니다.


참고

편집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1 구글 번역기(구글사전)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2 모니어-윌리암스 산스크리트-영어 사전 Monier-Williams Sanskrit-English Dictionary 1899 Sir Monier Monier-Williams,Ernst Leumann,Carl Cappeller by Cologne Digital Sanskrit Dictionaries project
(사용예시) muhūrta (input:Roman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

गो (input:Devanagari Unicode , output: Roman Unicode)

(모음 예시)ā a , ī i,ś s ṣ ,r,ṛ

कोष्ठक koṣṭhaka 그릇 또는 받침대 ,अल्प alpa 작은(small,little)
네이버 힌디어사전 (예시) 제자 弟子 शिष्य śiṣya , trikoṇa트리코나(삼각형) tri त्रि(=त्रय traya) 3(셋) ,각(도) कोण koṇa


  1. Raja Yoga(yogasutras) Swami Vivekananda(Patanjali) 1899[1]
  2. Gorakhnath And The Kanphata Yogis by George Weston Briggs 1938 #
  3. An Introduction to Yoga by Annie Besant 1907#
  4. (구텐베크르 프로젝트)The Principles of Psychology, Volume 1 (of 2) by William James#
  5. (易經)The Yî King(and Ten Wings) translated by James Legge#
  6. 집중의 정의를 (재)확보,유지,경청(또는 주목)의 3단계로 구분해본다면 (재)확보란 안정(안전)을 보장하는 시공간(spacetime)의 흐름속에서 (힘의)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과 몸의)경청의(주목한) 결과입니다. 시작은 이렇게 확립(確立)됩니다.
  7. 집중의 과정은 흥분과 진정(차분)이라는 인지와 정서의 시소(seesaw)이자 싸인곡선(sine曲線,정현파)입니다.
  8. [3.1] Dhāranā is holding the mind on to some particular object. [3.1] 다라나는 어떤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붙잡고 있습니다.
  9. 다음은 (프라나야마와 무드라를 위해서)요가의 첫번째 악세사리 아사나(asana)에서 집중(사마띠)을 기술합니다. (재)확보(또는 부동不動 또는 보장guarantee)는 초보자가 아사나를 단단히 짜보려고 해볼때 1초도 않되서 힘들게 확보한 자세가 무너질수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유지는 실력이 늘면 10분이상도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경청(listening 또는 주목注目attention)은 언제나 할수있습니다. 경청(주목)은 초보자이건 숙련자건 전문가이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가능합니다. 따라서 가장 첫번째로 고려해야할것은 바로 경청(empathic listening)일 것입니다. 마음이 몸의 소리를 듣는것을 경청하십시요.(아사나를 시작하기전 아사나중에 그리고 아사나가 끝나고 나서도 말입니다)
  10. 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
  11. 집착을 가질수도 버릴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해본다면 그 대상의 본질이 되는 집착은 사랑을 낳을수 있고 그 사랑은 희생을 낳고 그 희생은 또다시 그 존재를 넘어서는 본질이 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영원한 그러나)취할수없는것을 선택할수도있지만 줄수있는 영원한 것을 선택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2. 첫번째 질서(1st order) = 아디나타ādiātha(ādi 첫번째 ,nāth 힘) = 중력(重力 gravity,gravitation) [예시]하늘에서 내려와 뒤죽박죽된 빗물들이 가장 낮은곳으로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더낮은곳으로 물길을 이루고 흘러갑니다. 바다는 그 시작과 그 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연(整然)한 근본 질서는 바로 중력(gravity 또는 G-force)일것입니다.
  13. [4.58]The whole of this world and all the schemes of the mind are but the creations of thought. Discarding these thoughts and taking leave of all conjectures, O Râma! Obtain peace. 이 세상 전체와 마음의 모든 계획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오 라마여,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추측을 버리십시오! 평화를 얻으십시오.
  14. Hp(하타요가프라디피카)[4.29]Mind is the master of the senses, and the breath is the master of the mind. The breath in its turn is subordinate to the laya (absorption), and that laya depends on the nâda. 마음은 감각의 주인이고, 호흡은 마음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호흡은 라야(laya)에 종속되고, 그 라야는 나다(nāda 소리)에 의존합니다.
  15. चित्त citta thinking(생각하다), reflecting(반영), imagining(상상하다)
  16. वृत्ति vṛtti mode of life or conduct, course of action, behaviour (삶의 방식이나 행동 양식, 행동 과정, 행동)
  17. पुरुष puruṣa the soul and original source of the universe 우주의 영혼이자 근원
  18. 여기서는 '물결치는' 이라고 이해해볼수있다.
  19. 파탄잘리(Patanjali)를 위시해서 바샤(bhashyar)같은 학자나 제사관들
  20. To see(seer) draṣṭu द्रष्टु=दृश् = पुरुष puruṣa(=purusha) 양심 및 영혼 또는 (간혹)이성
  21. 더 나아가 착시효과 그리고 맹점(盲點)
  22. 과학적 방법(科學的方法)은 재구현(사용)이 가능한 객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사회적ㆍ물리적 조사에 사용하는 일련의 체계적 절차이다. 이러한 절차는 -아이디어 또는 대상(개념)기준 설정 > 측정 방법의 기술(describe) > 사례(표본)의 관찰(가설 구체화) > 사실 발견을 통한 결론의 도출 > 결과를 사용한 사실의 재구현-의 순환이다.
  23. [참고]제임스-랑게 이론(예시)슬프기에 우는것이 아니라 울기때문에 슬픈것이다.
  24. संस्कार saṃskāra putting together, forming well, making perfect,making ready, preparation, forming the mind, training, education,correctness 합치다, 잘 이루다, 온전하게 하다, 준비하다, 준비하다, 마음을 다지다, 훈련하다, 교육하다, 올바름
  25. 시냅스 가소성(synapse可塑性) 또는 신경가소성과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를 참고할수있습니다.
  26. वैराग्य vairāgya freedom from all worldly desires 모든 세상(대상,사물,삶)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는 거부(renunciation)라는 단어가 주요하게 사용됬다.
  27. तम tama darkness 어둠
  28. रज raja 감정,정서
  29. सत्त्व sattva 존재,활력,생명
  30. 상캬 또는 상크야(Sankhya) = 삼크야(samkya) 또는 삼캬
  31. ईश्वर īśvara able to do(의지),the Supreme Being(첫번째 질서,(예시)중력)
  32. 진동(振動) , 파동(波動),울림
  33. [개역한글판](성경) (창세기1장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34. 진동(振動)소리
  35. 아멘(amen)[기독교]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그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하는 말. 한국어에서는 '음'을 참고할수있다.
  36. (ओम्om음) 아aअ(viṣṇu(KH)viSNu), 우uउ(śiva(KH)ziva), ㅁmम्(brahma)들의 삼위일체(三位一體)
  37. LAD(Language Acquisition Device Theory) - 언어습득장치 이론(노엄 촘스키 등)
  38. 고전적 조건형성(Classical Conditioning),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러시아)Ivan Petrovich Pavlov
  39. om,aum, uhm 아움,흠,옴 등
  40. 일별(日別)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예시) 동지날이 지나자 일별은 (조금씩) 해가 길어지는것을 느낄수있었다.
  41. [周易](Book of Changes)주역(역경) 제1괘 건(第一卦 乾) 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
  42. 원형이정(元亨利貞)-원(元)은 근본을 살핌이다. 형(亨)은 순리를 살핌이다. 이(利)는 이로운바를 살핌이다. 정(貞)은 곧고 바름을 살피는것이다. 근본은 시작과 끝을 말한다. 순리는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많은 것을 일컫는다. 이롭다는것은 족함과 부족함을 아는것이다. 바르다는것은 객관성을 살펴 어긋나지않게 조치한다는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사람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최선에는 부족함과 족함이 있고 족함과 부족함의 이롭고 해로운바는 깊이 헤아일수는있으나 사람의 일은 온전할수는있을뿐 완전할수는없기에 사리를 쫓아 판단하여 객관성을 확보하고 조치하기를 최선을 다하는것이다.
  43. 주역 第二卦 坤(文言曰)坤至柔而動也剛,至靜而德方。後得主而有常,含萬物而化光。坤道其順乎!承天而時行。문언 왈,곤은 지극히 유하니 움직임에 강한바이다. 곤은 지극히 안정되니 덕이 사방이 이른다. 후에는 그 주요한바가 되니 항상 (떳떳한 바가) 있는것이다. 만물을 함양하여 빛나는바가 있다. 곤의 도는 그것이 순리에 순응하는것이기때문이다. 하늘에 응하여 때에 맞는다.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의 여유가있는바인것이다. 선행을 행하지못하여 선이 쌓이지않으면 반드시 넘치는 재앙이 있는것이다.(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다. 남는것이 적으면 자신에게서 그치나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친다.)
  44. 남들의 불행속에서 나 자신만이 행복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불행하더라도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행복해 진다면 그것으로 나는 (다시)행복해질수있기 때문입니다.
  45. 받은 선행보다 준 선행이 많으면 남는 선행이 있고 받은 악행보다 준 악행이 많으면 남는 악행이 있습니다. 남는것이 적으면 (그것이)자신에게서 그치겠지만 남는바가 크면 세상에 미칩니다. 나부터가 이러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이로써 알수있습니다.
  46. प्राण prāṇa the breath of life,a vital organ vital air ,생명의 호흡,(생명의) 공기
  47. आकाश ākāśa a free or open space, vacuity (무언가를 담을수(담고)있는 (빈)공간)
  48. 신경가소성 이론과 (뇌)보상시스템 그리고 대뇌와 소뇌의 국지화이론을 참고할수있습니다.
  49. 시냅스 가소성(synapse-neuroplasticity) 및 시냅스소포가설(synapse小胞假說)을 참고할수있습니다.
  50. 슬럼프 , 침체기 같은
  51. धारणा dhāraṇā the act of holding, bearing, supporting, maintaining (붙잡아)쥐고, 견디고, 지지하고, 유지하는 행위.
  52. 묵상,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
  53. [예시] 치타(chitta) 파동이 일어나는 (마음의)호수, 브리티스(vrittis) 물위에 떨어지는 나뭇잎(또는 (파동을 일으키는) 바람), 푸루샤(purusha) 호수표면(위)에 비친 달(빛)
  54. ध्यान dhyāna meditation, reflection 명상,성찰,사상(寫像)
  55. अव्यक्त avyakta (최초의)원형
  56. 희생을 댓가로 존재하는 자를 사랑의 희생으로 존재케하는 것은 집착하지않는 (또는 집착이 없는)집중 보다 더 '씨 없는 사마띠'에 접근할수있도록 합니다. 이것이 무한한 계단을 오르는 라자요가(숭고한 수행)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57. निर्बीज nirbīja 씨없는 , समाधि samādhi (putting together, joining or combining with)와 함께 합치다, 합류하다, 결합하다 또는 concentration of the thoughts 생각의 집중, 한편 요가철학과는 달리 (힌두교,불교 등)종교적으로는 무종자삼매라는 명칭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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