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리

편집

그 다음해 정월 그것도 눈 오는 날 저녁 영철은 다시 동경으로 떠나갔다.

영철을 보내는 소희의 마음엔 지난 구월에 헤어질 때와는 딴판으로 남편이 멀리 떠나가는 그런 울적한 기분이었다.

영철도 소희가 자기 아내 같아서 그 전과도 다르게 떠나기 전날 밤은 집안을 잘 보살피라는 말이며 어머님 시중을 잘 들어드리란 말이며 토지에 관한 이야기, 추수에 대한 이야기며 가정 경제에 대한 가지가지 이야기가지 하였다.

소희는 그 말을 머리를 숙이고 듣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면 길수록 그 집이 더욱 제집 같은 생각이 나고 영철이가 제 남편 같은 생각이 나서 눈물이 겨웁도록 영철이가 미더웠다.

(나는 무슨 복을 타고 나서 고생으로 부모도 없이 자란 몸이 이다지도 행복스러울까?)

하고 생각을 할 때에는 그만 눈에는 눈물이 핑 돌기도 하였다.

마음은 사랑의 불타는 작은 맥박으로 소희의 심장을 더 한층 높이 뛰게 하였다.

그러나 영철이가 동경으로 들어간지 며칠이 안 되어 소희게는 청천의 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그것은 소희있는 보통학교서 백리 길이나 되는 K공보교로 전임 사령이 내린 것이다. 소희는 '삼 학기에 무슨 이동이야, 그 까짓것 그만 사직해 버리지'하는 생각도 했지만 불과 석달이면 의무연한이 끝나는 걸 그걸 채우지 않기 때문에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는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희는 생각하던 끝에 영철에게 이런 사정을 오해 없도록 편지로 써 보내고 그만 부임지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소희의 이 자기게 부여된 의무를 충실히 한다는 정성된 마음은 영철에게 커다란 분노를 샀다. 그것은 소희가 영철의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맘대로 떠나갔다는 게 영철의 자부심을 꺾었다 하여 크게 분노를 산 것이다.

그것만이라면 영철의 일시적 흥분만 사라지게 되면 그를 용서할 아량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도 한 장의 밀서가 영철로 하여금 소희를 극도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 밀서라는 내용이란 이런 것이었다.

'소희씨는 당신의 애인이 아니요. 준걸의 애인인 줄을 당신은 왜 모르십니까? 당신의 돈을 탐내는 소희는 당신을 이용하려는 수단에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헛웃음을 판 것임을 모르시는 것이 퍽 보는 사람의 눈을 딱하게 만듭니다. 이번 소희가 전근이 된 것도 결국 자기가 그곳으로 운동한 겝니다. 그것은 준걸군이 며칠 전 그곳으로 전임된 때문입니다. 그렇게 못살게끔 떨어지지 못하는 소희와 준걸의 사이를 당신은 모르시구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당신 장래를 위하여 크게 우려할 일입니다.

방관생'

편지를 다 읽은 영철은 다시 봉투를 보았다. 필적은 자세 알 수 없으나 일부인은 자기 고향 S읍이란 것이 똑똑히 찍혀 있었다.

(결국 소희는 가난한 환경의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이 참말이었던가?)

이렇게 생각하니 영철의 가슴은 적막하였다.

(그러면 소희는 그에게두 정조를 바쳤을 게 아닌가? 준걸에겐 참된 사랑으로 내게는 돈이나 의리 때매)

사람이란 남을 버린 때는 그리 이롭지 않았지만 남에게 버림을 당할 때는 괴롭고 아픈 것이다. 이것이 가엾은 평등주의자 영철에게도 들어맞는 한 개의 진리였다.

그날 밤 영철은 밤새껏 잠을 못자고 고민을 했다. 가버린 소희게 대한 생각이 못살게도 영철의 자존심을 꺾어 버리고 사랑의 꽃동산을 무찔러 놓은 때문이다.

이리하여 영철은 고민 속에 하룻밤을 새고 나서 그 이튿날 충혈된 눈으로 소희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 속에 쓴 편지는 끝끝내 가버린 그대로 돌아오지도 않고 또 그에 대한 아무런 회답도 오지 않았다. 더구나 그 곳에 갔으면 잘 갔노라는 편지쯤은 있을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그것조차 없는 걸 보면 소희는 아주 가버려 다시 볼 수 없는 어여쁜 별과도 같이 생각이 되어 가슴이 쓸쓸하였다.

여성을 하나 사귀고 버린다는 것을 그렇게 어려운 일로 알지 않던 그에게 이같이 고민하는 영철의 마음은 한 개의 기적이었다.

(나를 버리다니, 준걸이 같은 녀석에게 그 아까운 소희를 빼앗기다니?)

생각만 해도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분한 일이었다.

(그럼 왜 소희가 내게 몸은 허했을가? 왜 금강석 엔게이지링은 받았을까? 그리구 나와 오는 삼월 결혼식을 한다구는 했을까? 그게 모두 거짓말일까? 더러운 계집요녀 같은 년.....)

이렇게 소희를 원망도 해보았다.

(그럼 왜 당신과는 도저히 결혼 할 수 없어, 준걸이와 결혼을 하니 그리 알기나 하라고 똑 맺고 끊는 편지 한 장두 보내지 않는담. 침묵으로 나를 괴롭히려는 건 비겁한 행위가 아냐? 그러면 내가 무슨 항의를 할까봐? 아 비겁한 계집 가정 교육이 없는 계집이니 그럴 수 밖에...)

이렇게 욕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가슴은 더 괴로웠다. 끝없는 고독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정월이 다 가고 이월이 오도록 소희게서 편지는 오지 않았다.

(매정한 계집... 내 반생에 그렇게두 진정으로 사랑한 여성이 고따윗 계집이람? 온참 속아두 그렇게 맥힌년 한테 속는 건 더 아픈걸.....)

소희의 젖은 듯 그리고 윤기 있어 보이는 까만 눈이 영철이 눈앞에 아질아질 할 때 영철은 가슴을 치며 부르짖었다.

(고 눈이, 고 눈이 사람을 속이는 눈이거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영철은 위스키 병을 들어 몇 잔을 따라 마시었다.

아질 아질 취흥이 솟아 오를 땐 미칠 듯이 소희가 다시 그리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매정한 계집년이거든. 고런 야속한 계집을 평생 내 아내루 삼으려는 내가 잘못이지, 어쩌면 고따위 쉬파리 같은 계집을 온 참 그럼 나는 또 다른 여성을 구해야 한단 말인가? 혜옥이 사건 이후로는 한 여성을 만나 평생을 같이 하려고 결심한 그 굳은 맹세를 소희 고 계집때메 꺾어버리고 말어야 한담?)

아무래도 잊을 수 없는 소희 생각에 초조하던 영철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몇잔 술에 흥분된 머리로 옷을 갈아입고 문밖을 나서서 그는 거기서 멀지 않은 ××카페로 발길을 옮겨 놓았다. 심심할 때마다 늘 가는 그 카페에는 '아끼꼬'란 예쁜 계집이 어느 때든지 방글방글 미소를 띄우고 맞아 준다.

유달리 오늘 우울한 표정으로 들어서는 영철이를 보자 "아이 왜 이 모양이세요..... 제가 퍽 보구 싶든 가봐?" 하고 말큰한 두 팔로 목을 끌어안아 준다. 영철은 아무 말도 없이 한편 모퉁이에 앉아 술을 청했다. 그러나 그 밤이 다 가도록 먹었지만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그 어느 날 동경의 눈보라도 마지막인 듯 처량한 황원을 흔드는 밤! 영철은 시외 에고다(江古田)에 있는 명신(明信)이를 찾아 갔다.

이층 마도(유리창)까지 닫치고 '고다쯔' 속에 묻힌 명신의 방은 푸른빛 커어버를 씌운 전등이 불빛도 은은하게 비치어 아름답고 포근한 맛이 방 가득히 흘러 넘쳤다.

"오섰어오....."

와후꾸(일본 옷)을 입은 채 명신의 얼굴은 더 한층 명랑해 보였다.

"밤이 늦었는데 미안합니다....."

"아뇨 아직 여덟신데요 뭐....."

"시험은 다 치르섰어요?"

"네, 학과 시험은 다 되고 성악 시험 뿐야요....."

명신은 무장야음악학교(武藏野音樂學校) 성악과의 졸업반이다. 그들은 지난 일월 조선갔다 오는 길에 차중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그 후 몇 번 서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처음으로 명신을 보는 영철이 마음에는 이상한 물결이 흔들리었다. 그것은 결코 영철이가 호색적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명랑하고 그 어딘가 사람을 끄는 듯한 촤밍이 영철이로 하여금 (참 아름다운 여자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 것이다. 사실 그 용모와 체격이며 그 품격이 세련되어 있는 것은 마치 귀여운 보배를 닦아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영철은 명신에 대한 타오르는 불길을 얼른 꺼버리기에 힘을 다했다. 그것은 첫째로 영철이의 굳게 먹은 마음 그 하나는 혜옥이가 죽은 뒤 여성이 그렇게도 무섭다는 것과 또 하나는 소희를 만난 뒤에 여성은 그렇게도 희생적인 일면이 있다는 것을 안 영철로서 사랑하는 소희가 있는 외에는 여성의 모든 존재를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첫째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오늘날의 소희를 안타까이 따를 것이 없이 새로운 이성의 사랑을 구하자는 생각 때문이다.

"변변친 않어두....."

영철은 십 팔원을 주고 산 이태리제 백포도주 한 병과 오원오십전을 주고 산 양과자 한통을 책보에서 꺼내놨다.

"아니 이건 왜 사 오섰어요?"

"일전 고치소(잘 먹음)하신 헨레이루(대신으로)....."

"천만에요, 제가 그날 두오 고라레루했는데요 뭐."

영철은 수일전 우연히 은좌에를 갔다 오던 길에 명신과 그의 동무라는 어떤 여성을 만나 점심을 먹었는데 그게 미안하다구 명신이가 차 한 잔을 오고루(한턱) 한 것을 슬쩍 꺼낸 것이다.

"그건 어떻든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천만에요 괜찮어요. 그런데 날이 퍽 추우신데 일루 들어오시죠....."

"괜찮습니다......"

"그럼 화로를."

하고 명신은 한편 모퉁이에 놓은 화롯불을 끌어다 영철이 앞으로 놓아 준다.

"괜찮어요 가죠 곧....."

"몸이나 녹이시구 가서야지..... 실례지만 이걸 한잔 드실까?"

명신은 아래 주인 방으로 내려가 유리잔 하나를 얻어 가지고 올라와서 영철이가 사온 포도주를 잔 가득 부어 준다. 한편으로 조그만 찬장에서 자기가 사다둔 과일이며 과자를 내어 놓으면서.....

"제가 사온 걸 제가 먹구 가면 되나요....."

"그러기 미안허다구 안 그랬어요. 사 오신 걸 잡수시라고 드려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오히려 더 미안한데요, 전 두시구 아침저녁으로 한 잔씩 잡수십사구 그랬는데요."

"아무구 기왕 뜯었으니 한 잔만 드시죠....."

"네 먹겠어요....."

영철은 잔을 비우고 명신에게 한 잔을 따라 줬다.

"전 이따 먹죠....."

"그래두 드세요!"

"그럼 한 잔만 할까?"

명신은 빈 잔을 들어 똘똘똘 나오는 포도주를 잔이 거의 넘칠 때까지 정성스럽게 받아 가지고는 붉은 입술에 대고 한 모금씩 한 모금씩 들여마셨다. 그 잔이 빌 때 명신은 또 한 잔을 따르려고 했다.

"그만 두서요 전 알콜분이 좀 있어야지 그런 건 안 먹겠어요....."

"그럼 술을 사다 드리리까요?"

"온 천만에요 그건 그만두시구 전 이 과자나 먹겠어요."

하며 영철은 비스켓 하나를 집어 문다.

"왜 그러서요....."

"괜찮어요....."

"참말요?"

"참말이구 말구요....."

"그럼 어떡허나....."

명신은 조금 난처해하는 듯이 이맛살을 약간 찡그렸다 다시 펴면서

"그럼 화로 가까이나 오세요!"

하고 영철을 치어다본다.

"녜."

그들은 화로 하나를 새에 두고 마주 앉을 수가 있었다. 손과 손이 마주 얹힌 채 따스한 불을 쪼이고 있는 양은 마치 겨울밤 다정한 부부가 무한한 행복에 찬 희열 속에 무슨 재미나는 이야기나 하는 것을 표증한 것 같은 한폭 그림과도 같이 보이었다.

"손이 퍽 고우신데요....."

"아이 참 퍽은 놀리시네....."

"그야 남녀가 벌써 다르잖어요? 손뿐이겠어요 모든 체격 전부가 다 그렇죠."

"그러니깐 결국 서로 합쳐야 되는 모양이죠. 남자는 여자가 없으면 살 수 없구 여자는 남자가 없인 못살구요."

"여잔 남자가 없어두 살 것 같어요. 그렇지만 아마 남자는 여자가 없이는 못 살걸요... 호호."

"그건 어째서요 그 반대가 아닐까요?"

"남자란 잘 모르죠만 잔일을 모르거던요 옷이라든지 먹는 게라든지 거처하는 게라든지 그밖에 모두 곰상곰상 한 걸 모르니까 그걸 여성이 보충해 줘야 하거든요. 그러니깐 남자 혼자만 살면 살림두 아무것두 다 안 될게 아냐요? 그렇지만 여자는 그걸 다 할 수 있으니깐 혼자 살어두 괜찮죠 머....."

"퍽 주부적이십니다 그려. 밥을 지을 줄 아나요, 옷을 만들 줄 아나요, 살림이 무엔지 알드라구요, 참 명신씬 의외군요....."

"왜요 할 줄은 다 알죠 머..... 그렇지만 안허죠....."

"글세 요새 신여성은 참 큰일이야요. 일단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부인 노릇을 해야겠는데 어디 그런 여성이 몇 개나 돼야죠. 제가 젠척하구 철없이 돈이나 쓰겠다죠,

말 일본 여성에게 비교하면 조선의 신여성은 아무것두 아냐요!"

"그럼 이선생은 신여성과 결혼하시잖었어요?"

"장차는 신여성과 결혼하긴 허겠죠만 좀 더 조선의 소위 신여성은 가정을 알고 사회를 알고 부부도를 알어야겠어요."

"왜 부부도를 모르는 여성이 있어요?"

"저 아는 친구의 아내는 겨우 여고 밖에 졸업하지 못했는데 이 여자가 참말 세상일을 모르드군요. 남편 친구가 와두 접대하나 못하면서 제 친구만 오면 뭣을 사온다 야단이죠. 그리군 남편의 수입이 한 오륙십원 되는데 최신 유행 옷을 해내라 모던 핸드백을 사내라 하꾸라이 화장품이 아니면 안 쓴대, 그리구 백금 반지를 하나는 다이야몬드 박은 것 하나는 진주 박은 것 두 개는 있어야 한 대, 흰 구두 노란 구두 검은 구두 비로드 구두를 사내라 축음기를 사내라 기누(비단) 양말 아니면 안 신는대, 또 이틀이 못가서 데파아드 밥을 먹여 달래 그래 이군이 그만 그 아내 때메 칼라 하나 사 매지 못해 때가 쪼르르 흐르게 하구 다니는 건 참말 안됐어요."

"참 그런 여성이 많어요. 배운 것은 생각잖구 그런 허풍선이 생활만 하려는 여자가 많은 건 사실야요. 그렇지만 이것두 과도기의 한 현상이죠!"

"그야 다소 생활여유가 있으면 문화 정도에 따라 그러는 게 당연하지만 수입두 없는 남편을 그렇게 졸라가지구 자기 몸만 사치하는걸 보니깐 그만 미운 생각이 나요! 부부 일신이거든 나가 일하는 남편은 땟국이 흘러도 본체만체 하구 자기만 화려하게 꾸미구 다니려니깐 그게 안 된 거란 말이죠!"

"그건 그래요....."

"그렇지만 명신씬 그렇잖으실께야!"

"아이 천만에요."

"그러나 명신씨야 왜 그런 각박한 생활을 하시는데루 결혼을 허시나!"

"그야 운명인 걸, 어떻게 할 수가 있나요!"

"만일 그런 곳으로 가시게 되면 제가 못 가시도록 하겠어요."

영철은 아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의 돈 있는 걸 자랑했다.

"이선생은 부자시니깐 그럼 제가 가난한 살림을 할 때 좀 도와 주시겠지요. 호호호."

명신의 말에는 약간 아이로니가 섞여 있었다.

"천만에요. 돈이 뭐 있나요. 그저 먹을 게나 있죠."

"잡수실 것 있다는 게 돈이 있다는 게죠 머 그런데 졸업허시군 곧 조선으루 가세요?"

"아뇨. 한 이삼년 더 있으면서 변호사 시험이나 쳐볼까 하는데요!"

"네....."

"명신씬요?"

"저요! 저두 한 삼년 더 있겠어요. 이태리 선생이 삼년간만 더 연구해 보라니까요. 오페라 방면을 더 공부해 보려는데 퍽 어려울 것같어요!"

"악단의 여왕이 되셔요?"

"아이 천만의 말씀을 다 하서요. 그저 되나 안 되나 배운 길이니 좀 더 착실히 공부해 보자는 것뿐이죠 머! 그럼 봄에 조선 안나가서요?"

"그만둘까 하는데요! 어머님 혼자 계시니깐 한번 가 봐야긴 하겠는데 좀 속히 시험을 통과 하자면 여기 꽉 들어백여야 하겠어요."

"어머님 혼자 밖에 안계서요?"

"네 혼자 밖에 안계서요. 그리구 누이 동생 하나가 있을 뿐이죠. 걘 지금 이화전문 문과에 있구요!"

"그럼 아직두 결혼을 하시잖었어요?"

명신은 갑자기 얼굴이 발개졌다.

"그럼요....."

"벌써 갔을겐데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기 때메 아직도 배철러지요 왜 믿어지지 않습니까?"

소희가 S읍으로 전임한지 두달이 되도록 영철의 편지는 끝끝내 오지 않고 말았다.

(전임한다는 편지두 받었을게구 전임 됐다는 편지두 받으섰을텐데)

소희는 안타까운 가슴으로 하루 이틀 영철의 회답을 기다리었으나, 웬 일인지 기다리지 않는 친구의 편지 혹은 광고 같은 건 매일 와두 그 긴한 영철의 소식은 그 거룩한 직책을 갖고 있는 우편 배달부도 전해 주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봐?)

이런 생각에서 왜 소식이 없느냐? 무슨일이 있느냐? 하고 몇 장의 편지를 거듭거듭 보내고 안타까이 기다려도 보았건만 영철이게선 끝끝내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일루 전임돼온 걸 불쾌하게 생각하시나?)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그렇다면 사직을 허구 집에가 있으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동경으루 오란 말씀이라두 있을 겐데 그럼 혹시 준걸이와 같이 이곳으로 왔다니깐 그걸 오해허시구 편지두 안허시나? 그렇지만 준걸이를 내가 뭐 상대나 한다구? 각 허실라구, 만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영철씨가 나를 즘생만두 못한 여자루 아는게 아냐! 그리구 자기 자신두 아무런 가치없는 사람으루 아는 게 아냐! 그럴린 없어, 그러면 왜 편지가 없을까? 그렇게두 나를 못 잊어 하시든 영철씨가 왜 아무런 편지를 하지 않으신담, 무슨 일에 노하셨나? 노하실 일은 없지만 노하섰드래두 어떻게 정면으루 꾸짖을 수도 있는 처지어든 그럼 웬 일일까?)

가지가지 생각에 잠 못들며 혹은 영철이가 보내준 지난날의 편지도 꺼내보고 혹은 그가 약혼 예물로 준 반지며 시계며 모두 다 꺼내 보았건만 그것들이 지금의 영철이 소식을 전해 주진 못했다. 그리고 지금에 불타는 소희의 안타까움도 시원히 식혀 주지를 못했다.

그러나 영철이도 소희에게 여러 장의 편지를 낸 것이 사실이고 소희도 영철이에게 여러 장 편지를 보낸 게 사실이건만 그들의 손에 한 장의 편지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면에는 그들이 모르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희준이란 남의 행복을 깨치기 좋아하는 악마주의자의 작희가 움직인 것이다.

희준은 준걸에게서 영숙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제이차로 소희와 영철의 행복된 사이를 어떡허든지 깨쳐버리려는 생각에 불타올랐다. 첫째 소희의 어여쁨이 미웠고 둘째 영철의 학식과 재산이 미웠다. 이리하여 그는 S우편소원이 자기 중학 동창인 것을 이용해 가지고 그들에게 오고가는 편지는 모조리 압수해 버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일방 소희와 준걸이 새에 있지도 않은 허무한 사실을 만들어 가지고 영철에게 밀서를 보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줄을 영철이도 소희도 알 리가 없었다.

영철은 결국 그 때문에 소희게 대한 사랑은 단념하게 되고 소희도 영철을 의심하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의 연극이라면 다시 영철과 소희는 다시 그 오해를 풀 기회도 있었으련만 영철은 결국 소희게 대한 반감에서 전 명신에게로 급히 서둘러 가지고 그해 삼월 십구일 경성 공회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소희는 그날까지 그것을 아지도 못하였다. 알 리가 없다.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영철과 명신은 동경으로 다시 들어갔다. 영철은 변호사 시험 준비를 목적하고 명신이는 성악을 더 연구하려는 불타는 희망을 가슴 가득히 싣고, 이리하여 밀월의 안타까운 단꿈 속에 그들이 다시 동경으로 들어갔을 때는 봄도 익어가는 삼월 그믐 햇볕이 고양이의 털과도 같이 보드러운 바람을 싣고 잠든 나무와 풀잎을 고요히 흔들어 깨워 신생하는 봄의 서곡은 희망 많은 젊은이와도 같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소희는 영철이가 그리된 줄은 알 길이 전혀 없었다. 다만 소식 없는 영철에게 대한 초조한 마음으로 석 달 동안을 지내다가 학기말이 되자 사표를 내고 황망히 동경으로 향해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소희는 우선 경성에 있는 그의 누이동생 영숙이나 만나 이런 이야기나 하고 떠나갈 생각으로 경성역에서 도중하차를 하였다.

전보를 쳐 두었더니 영숙은 역까지 나와 반가이 맞아 주었다.

"이거 웬 일야?"

영숙이의 명랑한 웃음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빛은 이상한 구름장이 약간 낀 듯 애련한 기분이었다.

영숙은 소희의 조그마한 배스키트를 받아들며 택시 하나를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웬 일야?"

차안에 들어앉으며 소희를 바라볼 때 얌전스러운 티로

"동경 가는 길야!"

하고 소희는 힘없이 말을 했다.

"동경은 왜 급작시리!"

"어찌된 일인지 내가 S읍으루 전임된다는 편지를 영철..

무 소식두 없거든, 혹시 노하섰나 하고 그 사정을 간곡히 써서 십여차나 편지를 드렸는데 그래두 아무런 소식이 없거든, 그래 어찌된 일인지 안타까운 날을 석 달 동안이나 지내다가 학기도 끝났기에 동경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나 들어볼까 하구 떠났어!"

"그래? 그런데 오빠는 네가 S읍으로 간 뒤는 갔다는 소식두 또 오빠가 오륙차 편지를 했었는데 그래두 회답이 없다면서 여자라는게 마음이 변하기 쉽다구 널 여간 원망하지 않든데?"

"뭐야 그게 참말이야?"

"그럼 사실이지!"

"건 어떻게 알어?"

"오빠가 나오섰었는데 뭐!"

"언제?"

"이삼일 전에 동경으로 다시 들어갔어! 그런데 소희 넌 모르냐?"

"뭘?"

"글쎄 오빠 조선 나왔든 일을 몰라?"

"몰라 시골구석에 있는데 뭘 알어!"

"참말?"

"참말이야.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겼어?"

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자기 오빠와 소희사이는 벌써 천리만리를 격해진 걸 생각하고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모르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두 사이임을 생각하는 영숙의 가슴은 너무도 쓰리고 아팠다.

"그럼 학교는 그만 뒀어?"

영숙은 묻는 말은 대답잖고 화제를 돌렸다.

"그만 두구 왔어! 아주 사표를 냈대두. 그런데 오빠가 왜 조선을 나왔었어?"

소희의 얼굴에는 의운이 어리었다. 눈에는 불안에 타는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거 큰일인데 큰일이 났는데....."

"글쎄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아 아니!"

차마 자기 오빠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말할 수 없는 말을 해야 할 괴로움, 그러나 지금 그것을 말할 수도 없는 안타까움, 그 명랑하고 쾌활한 영숙이 조차도 말문이 막히었다.

"글쎄 어떻게 나오섰드랬어? 응?"

소희는 더한층 의심스러운 듯이 영숙이 얼굴을 똑똑히 바라본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자동차는 종로까지 오게 되었다.

"여기서 내려 주서요!"

영숙은 배스키트를 들고 소희와 나란히 차에서 내리었다. 관철동 어느 깨끗한 여관방에 자리를 잡고 나서

"소희야!"

하고 영숙은 은근히 불렀다.

"................"

소희는 대답 대신에 그 둥그런 눈을 깜박이면서 영숙을 바라본다.

"소희야! 참말 오빠께 편지는 했니? 그리구 준걸씨와는 아무런 일두 없냐?"

"뭐? 준걸이? 그까짓 사내가 뭐기 그럼? 영철씬 내가 그이와 무슨 일이 있나허구 오해를 하섰나?"

"그럼 편지두 오잖구 또 준걸이와 같이 전임이 되어가구, 그런데다가 누구 편진지 너허구 준걸시허구 막 좋아헌다는 말을 쓴걸 받었다나? 그러니깐 오빠는 퍽 노하섰나봐!"

"그래서 오빠는 그걸 참으로 믿는다든?"

"그럼 그래서 분해서 그리다가 어떤 다른 여자를 사괴였다나?"

"그런데 조선은 왜 나오섰어? 그 여자 때문에 나오섰드랬나?"

"그 여자 때문에두 나오섰구 오빠 때문에두 나오섰구 그렇지 머....."

영숙의 말 속에는 또 한 가지 말이 있었다.

"그럼 두 사람이 같이 나오섰댔나?"

"................"

대답은 않고 머리만 끄덕이는 영숙에게 소희는 매서운 눈초리로 계속하여

"그럼 그이와 좋아허시나?"

하고 긴장된 얼굴빛을 지었다.

"글쎄!"

이렇게는 말했지만 영숙의 가슴은 괴로웠다.

"똑똑히 말을 좀 해줘 응!"

"................"

"똑똑히 말을 해줘 응?"

"................"

"글쎄 어떻게 됐어, 영숙아 말을 좀 해줘? 응?"

소희의 눈에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말할게 놀래잖겠니?"

영숙의 말소리는 약간 떨리었다.

"응! 무슨 일이든 놀래지 않을테야 어서 이야길 좀 해줘?"

"저어 오빠가 네 이야길 퍽 하시겠지?"

맘이 변해진지를 모르겠다구?

"뭐 내가 맘이 변했다구?"

"글쎄 편지를 일체 허잖으니깐 그리잖을께야? 오빠두 너와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했었다면서 그건 아까워 죽겠다겠지!"

"그런데 어떻게 됐어? 참말 난 편지를 열장이나 넘어 했는데."

"오빠는 그걸 못 받었대, 그런대 몇 번이나 나보구 네 이야길 허면서 예복을 입겠지, 예복을 입으면서두 또 소희가 얌전한 여성이지만 지독한 여성이라구, 한편 놓기 아까운 보배를 잃은 듯이 자꾸자꾸 되풀일 하겠지?"

"예복은 왜?"

소희는 아직도 영숙이의 말귀를 못 알아들은 듯 하였다. 그 소리를 듣자 영숙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예복을 입군 뭘 했기에?"

"................"

"말을 좀 해 응?"

"오빠가 그렇게 네 이야길 하면서 식장으루 들어갔어."

"식장? 결혼 식장으루?"

는 네 생각을 허는지 눈을 떴다 감었다 하면서 긴 한숨을 쉬이겠지..... 그러구는 뭣을 잊으려는 듯이 머리를 쩔레쩔레 흔들겠지? 참말 네 마음이 변찮었니? 편지두 했구 준걸이와 상관두 없니?"

"참말이야, 내가 왜 네게 거짓말을 하니? 편지를 열장을 넘어 했을게다. 그리구 준걸씨와는 아무런 일두 없어. 있으면 왜 동경을 갈려구 여기까지 왔겠니?

소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울고 울고 또 울어 그 밤이 샐 때까지 소희의 뜨거운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영숙이조차 기숙사로 가버린 쓸쓸한 방에 외로이 꼬부린 몸을 찬 자리에 굽히고 있는 소희 마음은 아프고 괴로웠다.

(어찌된 일일까? 그이두 나를 그렇게 사랑하면서 다른 여성과 결혼을 했을 땐 나를 퍽도 원망했겠지? 그러면 어떻게 돼서 내가 보낸 편지두 그이가 받질 못하구 그이가 보낸 편지를 나두 못받었을까? 누구의 장란으로 그렇게 됐을까? 어쩌면 십여 장 보낸 편지를 한 장두 못 받었담? 준걸이와 영숙이 새를 빼았었다구 자랑하던 희준이 장난일까? 그러나 희준이가 어떻게 할길이 있었을라구? 더구나 S읍으루 온 뒤에 한 편지가 안 들어갔는데..... 그럼 어쩐 일일까?)

아무리 생각하여도 편지가 중간에 없어진 내용은 알길이 없었다. 인전 그까짓 것보다도 멀리 간 영철이가 안타까이도 그립고 원망스러웠다. 원망하는 나머지 욕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 가슴은 여전히 답답하였다.

(만일 그렇게 속히 다른 여자와 결혼까지 할 반감이 생겼다면 나를 왜 찾아 올 수는 없었을까? 가을에두 병이 나섰다구 돌아 오섰거든 왜 그런 오해를 가지시구 나를 만나러 와 주지는 못했담? 그건 구실일거야 뭐 정조를 유린했으니깐 나를 버린게지, 사내들이란 그것만 빼앗으면 그뿐이라는데 그렇지만 이 뱃속에 꼼틀그리는 애는 어찌하누? 이애를 낳아가지구는 어떻게 해야 허나? 애비 없는 자식을 낳아가지군 더구나 경제적으루 자립할 수 없는 내가 어떻게 이애를 키워 가누? 그리구 결혼두 허잖구 애비두 없는 애를 낳아가지구 세상에 무슨 면목으루 살어간담?)

생각하니 괴로운 세상, 가는 길이 끝없이 험할 것 같았다. 한때는 행복된 순간을 어쩔 줄 모른 기쁨 속에 방그레 자기 혼자도 웃어본 소희연만 여성으로서 처녀로서 애를 배만 놓고 달아난 남편을 생각하는 이 순간에 있어서의 괴로움은 끝없는 절망이 미친 물결이 되어 자기 몸을 이리 밀고 저리 미는 것같이 어지럽고 안타까왔다. 전차 소리가 끊어지고 딱딱이 치는 소리조차 끊어진 새벽날 아직도 이른 봄 찬 바람이 창을 두들길 때 외로운 등불 아래 전전하는 소희의 마음은 천인절벽의 외로운 소나무같이 생각이 되었다.

봄이 와도 꽃을 볼수가 없고, 여름이 와도 향기어린 녹음의 자취를 찾을 길 없는 그런 외로운 절벽의 소나무, 가을바람이 건 듯 불어도 단풍든 풀과 나무의 그림자를 거센 눈보라에 외로이 떨고 있는 그 소나무와도 같이 생각되었다.

(그만 떼버릴까?)

이런 생각도 했다가는

(어떻게 그 생명을 낳기도 전에 없애버린담)

하고 자비로운 어머니의 마음도 가져보았다.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뱃속에서 꼼틀거리는 그 어린 생명이 소희 가슴에 가지가지로 괴로움의 싹을 돋워만 주었다.

(이 부끄러운 일을 허구 세상을 어떻게 다니누? 영철씰 한번 만나 담판을 해야겠는데! 그럼, 내일 떠날까?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굳게 먹은 소희는 새벽이 돼서야 겨우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아침 멀리 들리는 교회당 종소리에 눈을 뜬 소희는 일어나는 길로 하느님께 거의 습관적인 기도를 드리고 낯을 씻고는 갖다 주는 밥상을 받았다. 입맛 없는 밥을 그대로 내보낼 수 없이 몇 술을 뜨고 상을 물리었을 때 영숙이가 찾아왔다.

그들은 잠깐 방안에 들어앉았다가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일요일 날이라 그들은 예배당에 가는 길이었다. 소희는 그날 아침차로 떠나려 했지만 이십년이나 종교계에서 자라온 소희로는 도저히 일요일에 길 떠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영숙이가 하루만 쉬고 이야기나 하고서 가도 가라는 말에 소희 자신도 옛날 학생 시대를 추억도 할겸 예배당에를 갔다. 그러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아 예배가 끝나는 대로 그들은 다시 봄기운을 찾아 창경원으로 오게 되었다.

아직도 일러 벚꽃은 겨우 눈이 트고 삭 돋는 나무와 풀향기는 새봄을 노래하고 있어 우울한 소희의 마음에 더한층 요란한 물결을 지워 주었다.

소희는 영숙과 나란히 식물원 온실 앞 못 가로 발길을 ..고 있었다.

"소희야!"

"응?"

"어쩌문 좋으냐 글쎄! 이제 네가 동경을 가서 만일 우리 오빠를 만나면 뭘하니? 나두 모르는 그리구 나두 이해할 수 없는 그 편지 사연을 아무리 말한대두 오빠가 이해할 수 없을 게구 더구나 지금 새로운 가정에 네가 가면 큰 풍파가 날게 아니냐? 그러니 어떻게 조처할 도린 없을까?"

"................"

소희는 아무 대답도 없이 못 가에 떠도는 물매미만 바라 보고 있다.

"글쎄 그렇지 않어? 아무래두 그리 된 걸 이제 어떻게 돌이킬 순 없을 게 아냐? 그러니깐 아예 단념허구 어떻게 살아갈 도리를 하는 게 좋을 게 아냐?"

"그렇지만 어찌된 사정인지나 알어야 하잖겠어? 첫째 어째서 영철씨가 제게 했다는 편지를 내가 받지 못했구 또 내가 한 편지를 영철 씨가 받지 못했다는걸 알구, 무슨 오해가 있으면 풀기나 허구 그만 둬두 둬야지 어디 수가 있어? 그 뿐인가? 너의 오빠가 참말루 나를 오해 하시구 그 반동으로 속히 결혼하신 게 사실이라면 그 오해두 풀도록 해야 허잖어? 그러니깐 동경을 가야겠어!"

"그건 그렇지만 간댔자 무슨 증거가 있어야 오해두 풀게 안야, 그러니깐 그 오해를 푸는데는 동경 가는 것보다두 여기 있으면서 조사를 허는게 더 빠를거야. 그러니 소희야 그러지 말구 여기 얼마를 있는 동안 내 어떡허든지 조사해 줄게 좀 있어 봐 응?"

영숙의 마음엔 첫째 자기 자신도 그것이 알고 싶은 것, 더구나 자기 오빠가 관련한 것이니 만큼 어떡허든지 알아보아 비록 다시 그들이 합쳐지지는 못할 처지라 하더라두 그 오해나마 풀어 주겠다는 생각,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제 극도로 흥분한 소희가 가정을 갖고 사는 자기 오빠를 볼작시면 그 집에 가정 풍파가 일어날 것은 물론이고 또 그보다도 그 얌전한 반면 독한 소희의 성격으로 죽어버리든지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어떡허든지 소희를 붙잡을 생각이었다.

"어떻든 여기서 며칠만 있어봐요. 그러면 내 잘 조사해 줄게. 그러구 그걸 잘 알어가지구 오빤한데 내가 편지를 허면 그 오해가 풀어질게 아냐. 그리구서 또 어떡허든지 문제를 해결해 가야지 이제 다짜 고짜루 동경을 가면 싸움만 벌어지구 큰일이 아니냐!"

영숙의 말에는 두편을 다 아끼는 진정이 있어 보였다. 자기희생적 정신이 남보다 유난히 깊은 소희에게 그 말은 찔리는 듯 가슴이 아팠다.

며칠을 두고 동경을 간대야 별로 신통할게 없다는 영숙이 말에도 감동이 되고 또 소희 자신으로서도 생각하는 바가 있어 당분간 동경 갈 것을 보류하기로 작정을 한 소희는 평동(平洞) 그 어느 내외만 사는 집에 영숙이 소개로 기숙을 하고 있게 되었다.

낮에도 아무 하는 일이 없이 우드커니 앉아만 있고, 밤이 돼도 별로 찾아오는 사람 없이 지내는 고독한 소희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아프고 괴로웠다.

첫째 영철이 생각을 하면 자기란 존재는 벌써 잊어버린지 오래고, 그 어떤 여성인지는 몰라도 그 새로운 아내와 물샐틈 없는 행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을 눈앞에 그려보면 그만 미칠 것같이 마음이 어지러웠다.

(아무리 내 편지를 못받아 봤기로니 그렇게 평생을 약속한 나를 두고 몇 달이 못돼서 결혼까지 한담?)

어지러운 마음속에 이렇게 다시 그는 원망도 해보고 또

(대체 그 어떤 사람이 남의 행복을 깨치느라고 오고 가는 편지를 단 한 장도 빼지않고 버렸담)

하고 우편배달부도 의심해 보았다. 그리고는 또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와 가지고

(그럼 이 밴 애는 어떡헌담? 만일에 이애를 낳으면 누가 키우누? 또 애를 밴 몸으로 어떻게 직업인들...

이런 생각으로 애련한 봄밤을 새워가며 울어도 보았다.

(아무리 고쳐 생각을 해봐두 결국은 내가 정조를 빼앗긴 때문야! 만일에 내가 순결한 처녀로 있었다면 그이가 나를 찾아 불원천리 왔을거야!)

하고 그 눈 오던 밤 영철이 방에서 처음으로 깨치던 자기 몸을 생각도 해 보았다.

(어쩌문 어쩌문!)

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치고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마음은 어지럽고 끝내 안정은 오지 않았다.

남의 행복을 저주하는 것은 아니언만 주인집 젊은 내외가 다정하게 지내는 양 더구나 아내가 몸이 약해서 감기라도 걸리면 의사를 불러온다 약시중을 한다 자기 손수 남편이 들락날락하며 정성되게 간호하는 것을 보면 그만 소희는 무딘 칼로 가슴의 갈피갈피를 찢는 듯이 아프고 괴로왔다. 눈물이 흐르고 앞이 캄캄하였다.

(나두 한때는 영철씨게 저런 호사를 받았건만!)

온정리 호텔의 첫 가을 연애에 불타던 시절을 회상해 보며 하염없는 긴 탄식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지나간 꿈이 아니냐? 이같이 심신이 고달플 때 머리 하나 짚어 주는 사람없는 이 외로 한 사람이 아니냐? 천애의 고아! 과연 나는 의지할 곳 없는 몸이다)

소희는 이렇게 부르짖고 불끈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안타까운 하현달이 서편창에 처마 끝 음영을 지우며 은은히 엿보고 있다. 봄밤의 애련한 정조가 고요히 차고 매운 애수로 되어 소희의 전신을 싸고돌아 끝없는 정적 속에 소리 없는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흐르는 눈물이 양볼을 흘러내려 베개 위를 적신다.

아직도 이른 봄바람이 싸늘하게 창틈으로 스며든다. 고양이 소리가 몹시 애달프다.

(꼬끼요!)

닭 우는 소리도 이 밤엔 더욱 소희의 가슴을 병들게 한다.

시냇물 소리나 들린다면 깊은 산속 외로운 승방에 누워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정적과 고독한 공기가 흐르는 기분이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배에 얹어보았다. 처녀 때보다는 훨씬 부풀었다.

(이게 내 운명을 좌우할건가?)

소희 마음은 끝없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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